빼앗긴 문화재 ‘고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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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국가 원소유 국가·개인에게 반환… 문화재 반환사 분수령 기대

원소유 국가나 개인에게 반환키로 한 문화재. 얀스틴의 그림.

원소유 국가나 개인에게 반환키로 한 문화재. 얀스틴의 그림.

엘지니즘(Elginism)이라는 영어가 있다. 엘진은 19세기 초 터키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영국인 토머스 브루스(1766~1841)의 작위명으로, 그는 1801년부터 1805년에 걸쳐 그리스 판테온 신전의 대리석을 불법으로 런던으로 들여왔다. 그러나 이 대리석은 버젓이 런던 대영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로 자리잡으며 엘진 마블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이후 엘지니즘은 문화적 약탈행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약자의 반환요구는 묵살 일쑤

세계 유수의 박물관은 대부분 엘지니즘을 통해 수집된 문화유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박물관은 역설적으로 문화재 약탈 역사의 전시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문화재 약탈의 역사는 깊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전리품 형태로 문화유물이 약탈됐고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 피점령국의 문화유물을 약탈했다. 대영박물관에는 엘진마블을 비롯해 이집트의 로제타석, 탐험가 오렐 스타인이 가져간 중국 돈황 석굴의 유물이 있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약탈해온 유물이 가득하다. 국립 기메박물관에도 식민통치 시절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에서 약탈해온 유물이 전시돼 있다. 미국과 독일의 주요 박물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약탈이 아닌 정상적인 미술시장의 유통망을 거쳐서 구입된 유물도 시기가 이른 고대유물의 경우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화유물이 전혀 관련 없는 이국의 전시장에 진열되다보니, 문화유물의 역사적·공간적 맥락은 제거되고 원소유국 연구자들의 접근 또한 쉽지 않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왼쪽), 호머자기.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왼쪽), 호머자기.

유네스코는 `‘전시(戰時) 문화재 보호에 관한 헤이그 협약’(1954)을 시작으로 약탈된 문화유물에 대한 각성을 촉구해왔다. `‘문화재의 불법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그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1970) `‘전쟁이나 식민지로 인하여 빼앗긴 문화재의 원산지반환운동’(1979) 및 `‘도난·불법 반출문화재 반환에 관한 유니드로(UNIDROIT) 협약’(1995)이 발효되었지만 강력한 효력을 갖춘 국제법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유물을 빼앗긴 `‘약자’의 반환 요구는 묵살되어왔다. 또한 주요 박물관들은 현대의 윤리기준을 과거에 취득한 유물에 적용하기 어려우며, `‘문화 후진국에서 훼손됐을 유물을 선진국의 기술로 잘 보존해왔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약탈 문화재를 반환해달라는 국가 혹은 개인의 요구에 대해 그간 모르쇠로 일관하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이를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메트)과 네덜란드 정부,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각 약탈문화재를 반환해달라는 타국과 원소유자의 청구를 받아들여 이를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메트는 이달 초 도굴품 혐의가 있던 2500년 된 `‘호머자기’와 헬레니즘 시대 은식기 세트 15점을 이탈리아 정부에 반환하기로 했다. 이는 세계 주요 박물관들이 약탈문화재 반환으로 첨예하게 얽혀 있는 현재, 문화재 반환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국가 환수 미술품 후손들 품으로

1972년 메트가 100만 달러 이상을 들여 구매한 호머자기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30여 년 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정식명칭은 `‘칼릭스 크레이터’로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도기장 유시오테오스가 만들고 화가 유프로니오스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전쟁을 그려넣은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자기가 1971년 로마 북부 체르베테리에 있는 에트루리아인의 묘에 묻힌 부장품이라며 1996년부터 반환을 요구해왔다. 그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반환을 거부하던 메트 측은 지난해 이탈리아 정부가 미국 LA에 있는 게티박물관의 큐레이터와 도굴한 유물을 판매해온 이탈리아의 미술상과 미국의 미술상을 소환해 조사하면서 미술상과 큐레이터 간의 불법행위가 드러나자 태도를 바꿔 협상은 급진전을 이루게 됐다. 메트는 호머자기와 함께 시칠리아 지방에서 도굴된 헬레니즘 양식의 은제 장식품 15점과 고전시대에 속하는 다른 자기 4점을 함께 반환하기로 했다. 대신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 고대유물을 장기간 대여받기로 했다. 구체적인 반환날짜와 대여유물의 목록은 조만간 결정될 예정이다.

수많은 약탈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

수많은 약탈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

전쟁을 거치며 국가에 환수된 미술품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해온 개인들도 작품을 돌려받게 됐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정부도 지난 6일과 7일 이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을 원소유주에게 반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2차대전을 거치며 네덜란드 정부의 소유가 된 유대계 네덜란드인 자크 구드스티커가 수집한 회화 202점을 후손 본 사어에게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구드스티커는 렘브란트, 고야,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 거물급 화가들의 작품 1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전쟁을 거치면서 8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나치독일의 원수 헤르만 괴링의 소유가 되고 나머지는 각국의 미술관과 컬렉션으로 흩어졌다. 전후 네덜란드 정부에 반환된 괴링의 소장품 267점이 미술관과 정부청사 등 총 열일곱 군데에 흩어졌다. 이번에 반환되는 그림에는 얀 스틴과 리피 수사, 반 다이크 등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화가들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벨베데레 미술관도 ‘사과나무’ ‘자작나무 숲’ 등 20세기 초 활동하다 요절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5점을 원소유주의 후손에게 반환하기로 했다. 이번에 반환되는 작품 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가 유명한데 반환을 청구한 이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블로흐 바우어의 조카 마리아 알트먼이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블로흐-바우어의 가족이 소장한 클림트의 작품 5점을 빼앗았고 전후, 벨베데레 갤러리가 작품의 공식소장처가 됐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약탈문화재 반환에 적극적이어서 최근 몇 년 간 5000점 이상의 작품을 원소유자에게 반환해왔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탈취해간 외규장각 소장 도서의 반환을 두고 정부와 프랑스 정부간의 협상이 이달 말 다시 재개된다고 한다. 모쪼록 각국의 약탈 문화재 반환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결실을 보기를 기대한다.

<국제부/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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