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모범생 ‘케냐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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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로 촉발된 유혈사태 장기화… 종족 갈등에 경제양극화 겹쳐 수습 난관

유혈사태로 난민이 된 케냐 여성들이 22일 국제구호단체의 물품을 기다리고 있다.

유혈사태로 난민이 된 케냐 여성들이 22일 국제구호단체의 물품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 부정 시비로 시작한 케냐 유혈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다. 격렬한 반정부 시위와 종족 간 무차별 살육전으로 치달으면서 불붙은 폭력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음와이 키바키 현 대통령 측과 라일라 오딩가가 이끄는 야권은 선거 결과와 정부 구성 문제를 놓고 연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서구 언론은 한때 ‘아프리카의 모범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정도로 대륙에서 가장 안정된 나라였던 케냐마저 또 다른 분쟁지역으로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도대체 케냐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거 후폭풍에 흔들리는 케냐
케냐를 지금의 혼란으로 밀어넣은 직접적인 계기는 2007년 12월 27일의 대선이다. 2002년 집권한 키바키는 경제 성장과 안정론을 근거로 재선을 노리고 있었고, 이에 맞서 ‘오렌지야당운동(ODM)’의 오딩가 대표는 정권 교체를 주장했다.

케냐인들의 높은 참여 속에 치른 대선은 개표 도중 키바키 대통령이 돌연 작업을 중단시키고, 며칠 후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부정 의혹에 휩싸였다. 여론조사는 물론 대선 직후 실시한 개표에서 앞서고 있던 오딩가 대표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키바키가 선거 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케냐 선관위원장도 “키바키가 선거를 이겼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해 의문을 증폭시켰다.

선거 부정을 둘러싼 논란은 곧 거리 소요 사태로 번졌다. 수도 나이로비 외곽의 대규모 슬럼가인 키베라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소요는 급속도로 케냐 곳곳에 퍼져나갔다. 경찰이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단순 항의를 넘어 약탈과 방화, 보복 살인으로 비화한 폭력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케냐의 연말연시는 피로 물들었다.

일련의 사태로 현재까지 숨진 이는 7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케냐에서 대선 이후 난민이 25만 명 이상 발생했다고 밝혔다. 넘쳐나는 난민을 수용할 곳이 없어 인접 국가로 이동하는 등 긴급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불안은 점점 커지고 아프리카에서 선두를 달리던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전염병과 물자부족 등으로 10만여 명이 기아에 처했다는 국제 사회의 경고는 케냐가 극심한 식량 위기에 처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혈 사태가 키바키 대통령의 부족인 키쿠유족들을 집중 겨냥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자 인종 청소 또는 제노사이드로 비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서구 주류 언론에선 1994년 후투족들이 100일간 투치족 80만 명을 집단학살한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빗대어 케냐를 ‘제2의 르완다’로 지칭하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케냐의 경우, 르완다같이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으로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21일자에서 이미 선거운동 기간 때 지역의 부족별 회의에서 타 부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내용을 논의하는 등 ‘종족 캠페인’이 난무했다고 보도했다.

종족 갈등은 예견된 비극

케냐 야당 지지자들이 23일 나이로비에서 지도자 라일라 오딩가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뛰어가고 있다.

케냐 야당 지지자들이 23일 나이로비에서 지도자 라일라 오딩가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뛰어가고 있다.

선거전이 유혈 충돌로 얼룩진 것이 케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다당제 도입 후 첫 총선을 치른 1992년부터 2005년까지 폭동과 종족 간 비방이 종종 반복되어 나타났다. 부패와 연고주의에 물든 정치인들이 종족 간 감정을 부추겨 정치적 지분을 얻으려 한 탓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종전과는 사뭇 다른 규모와 강도로 진행되고 있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부터 일기 시작한 종족 간 불화에 더해 케냐의 경제 양극화, 국제정치 상황까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케냐는 40개가 넘는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키바키 대통령을 배출한 키쿠유족은 전체의 약 22%로, 가장 부유한 종족이다. 1963년 독립한 이래 이들이 정치·경제 등 전 분야의 주요 자리를 독점하며 케냐를 지배해왔다는 것이 최근 다른 종족들에게서 집중 포화를 받는 배경이다.

그 자신이 키쿠유족이었던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는 키쿠유족에게 온갖 특권을 줬다. 비옥한 땅이 많은 서부에 키쿠유족들을 집단이주시켜,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칼렌진족이나 루오족 등이 소유한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도록 허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케냐에 잔존하는 뿌리 깊은 종족 간 반목은 실상 제국주의의 달갑지 않은 유산이다. 종족 간 차이를 부각시키고 한쪽에만 특혜를 주는 일명 ‘분할통치’ 전략의 결과로 종족 간 대립의 골이 깊어진 것. 케냐가 독립한 후에도 정치·경제적 이권을 계속 유지하려던 영국은 종족 구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구역을 책정하기도 했다.

하버드대 아프리카학 캐롤라인 엘킨스 교수는 “식민 역사를 고려하면 케냐에서 종족 갈등이 좀 더 일찍 불거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흔히 아프리카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오랜 종족 간 혐오가 실제로는 ‘식민지적 현상’이며, 파키스탄·짐바브웨·이라크 등 다른 과거 영국 식민지들에서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종족 갈등에 더해 경제 양극화도 유혈사태를 심화하는 요인이다. 키바키 정권 하에서 케냐는 연평균 5~6%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케냐 전 국민의 55%가 하루당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는 조사는 아프리카의 모범국치고는 부끄러운 성적표다. 이들의 박탈감은 ‘키바키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케냐는 어디로
전략적 이유로 서구가 케냐의 부정부패를 용인한 것도 사태를 키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케냐를 아프리카 대테러전 전초기지로 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도 키바키 정권이 출범한 1년쯤 뒤에 반부패 정책을 총괄하던 이가 영국에 망명해 부패 실상을 폭로했음에도 이를 간과하고 오히려 원조를 더 확대했다. 결과적으로는 키바키의 입지를 넓혀준 셈이다.

이처럼 복잡한 요인이 서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것은 케냐 사태를 수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짐작케 한다. 키바키 대통령이 거국 내각 구성 등을 제안하며 야당을 달래려는 분위기지만, 오딩가 측의 입장은 완강하다.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오딩가는 “나는 지금 긴 싸움을 벌이고 있다”라며 당분간 타협은 없을 것임을 암시했다. 오딩가의 ODM은 케냐 정부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케냐인들의 바람은 대선과 같은 날 치른 총선에서 드러난 듯하다. 오딩가의 야당은 210석 중 95석을 차지해 키바키의 당을 두 배나 앞질렀고, 키바키 정권 장관의 절반은 선거에서 패했다. 국민이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정치권과 국제사회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 슬기로운 타협점을 찾을지가 관건이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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