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인간관계를 양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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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결혼 축의금에 관한 사연이 SNS에 종종 보인다. 대부분 ‘축의금 3만원 한 친구와 손절해야 할까요?’ 따위의 내용이다. 액수에 대한 고민은 축의금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예전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축의금을 일종의 현금 교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도움과 은혜

축의금이나 부조금의 기본 성격은 ‘돕는다’는 데 있다. 도움은 양적 교환이 아니다. 내가 같은 양의 대가를 돌려받을 생각으로 상대방을 돕는다면 애초에 도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그가 내게 무언가를 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주었던 도움과 그가 돌려주는 것의 가치가 동일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움을 ‘돌려받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만일 그가 은혜를 갚기 위해 나를 도와준다면, 이는 받았던 도움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새로운 도움을 주는 것이다.

도움이나 은혜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고, 이는 사라지지 않는 부채 관계를 남긴다. 이런 의미에서 ‘은혜를 갚는다’는 행위는 빌린 돈을 갚는 것과 근원적으로 다르다. 금전적 부채 관계는 돈을 갚으면 완전히 청산되지만, 은인에게 보답한다고 해서 받았던 은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은혜를 갚는 것은 부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부채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즉 은인의 은인이 되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은혜를 주고받으며 청산 불가능한 부채 관계를 축적하는 것이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축의금을 비롯한 전통적 상호부조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화에서 주인공 이지안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준비해준 박동훈의 친구들에게 “꼭 갚을게요”라고 말하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뭘 갚아요,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에요”라고 타박한다. 이게 도움과 은혜의 논리다. “인생 깔끔하게 사는 것”, 즉 갚지 못할 것을 갚으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선언이다. 갚아야 할 것이 계속 남아 있어야 참된 인간관계가 유지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묘사하는 과거는 순수한 도움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이상적 공간이다. 첫 번째 화에 등장한 쌍문동 가족들의 반찬 나눔을 보자. 이는 물물교환이 아니라 끝없는 부채 관계의 재생산이고, 결국 반찬의 무한 순환에 이르게 된다.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인간관계의 기본 성격이 이 장면에 고스란히 압축돼 있다.

물론 양적 교환과 완전히 분리된 도움과 은혜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다. 도움을 주면서 대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흔히 부모는 대가 없는 사랑을 준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많은 부모가 보상을 기대한다. 그래서 자식의 인생에 개입하기도 하고,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현실의 사회관계는 다음의 두 가지 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대가 없는 순수한 도움이고, 둘째는 대가와 보상의 논리를 철저하게 따르는 양적 교환 관계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양적 교환이 지배하는 사회

법과 계약에 기초한 권리-의무 관계는 현대사회의 기본 형식과 조건을 규정하지만, 삶의 모든 영역을 직접 지배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 도움, 은혜, 호의, 친절 같은 비계약적 부채 관계이고, 이는 분명한 명시적 규칙이 아니라 느슨한 사회문화적 관습을 따른다. 가족, 친구, 연인, 직장, 공적 장소 등 영역과 공간에 따라 다양한 관습이 적용되고, 사람과 시기에 따라 관습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일상 관계의 갈등 대부분이 이런 느슨함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특히 나와 상대방이 관계를 다르게 이해할 때, 그래서 상대에게 기대한 것을 돌려받지 못할 때 관계는 절망의 장소가 된다.

아무리 느슨하다고 해도 관습적 규칙은 존재하고, 시기에 따라 특정한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 한국사회는 앞서 말한 두 가지 극단 중 양적 교환 관계에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다. 관계의 가치를 양적으로 평가하고, 주고받는 것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예전 칼럼에서 다뤘던 노력과 공정에 대한 집착, 복수극을 향한 열광, 나의 불편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 등이 구체적 사례다. 공정이란 시험 점수에 대응하는 양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고, 복수는 죄와 죗값을 등가 교환하려는 시도다. ‘내가 준 것만큼 돌려받아야 한다’,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 ‘내가 잃은 만큼 상대방도 잃어야 한다’, ‘나만 손해 보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따위가 현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 아닌가?

결혼식 축의금을 둘러싼 갈등에는 ‘내가 네 결혼식에 OO원을 냈으니 너도 비슷한 수준을 내야 한다’, ‘결혼식에 와서 OO원짜리 식사를 했으니 축의금도 그 정도는 내야 한다’ 따위의 생각이 개입돼 있다. 그런데 축의금은 애초에 전통적 가족 제도와 상부상조에 기초를 둔 관행이고, 이는 양적 교환이 아니라 대가 없는 도움의 논리를 상정한다. 축의금을 교환의 논리에 따라 주고받을 거라면, 차라리 결혼식 곗돈이나 제도화된 공동 기금을 만드는 편이 낫다. 도움의 논리에 따라 발명된 관행에 교환의 논리가 개입하면서 유치하고 민망한 갈등이 종종 발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의 원인 중 하나는 결혼식 자체의 상품화에 있을 것이다.

양적 교환과 대가 없는 도움은 사회관계의 여러 유형 중 일부이고, 이 두 가지가 복잡하게 중첩돼 현실의 관계를 구성한다. 순수한 도움의 논리만 따르는 인간은 복고 드라마 속에나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유형 중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양적 교환이 모든 사회관계를 집어삼킬 때 발생한다. 지금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파괴적인 규칙, 즉 모든 관계를 양적 교환으로 환원하라는 규칙이다. 하지만 이런 규칙에 따라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관계란 기본적으로 질적인 것, 양적 가치로 온전히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에게 준 것과 그에게 받은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관습적 규칙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질적 비대칭성을 적절히 관리하는 데 있다. 양적 교환의 규칙은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고, 관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축의금에 관한 공통된 기준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사회 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체를 유지하기 힘들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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