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생필품 구하려 장벽 무너뜨려… 분쟁 해결 난항으로 평화협상 먹구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집트를 가로막고 있던 철제 장벽이 지난 1월 25일 무너졌다. 이스라엘 봉쇄 정책으로 생필품난에 시달리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집트 국경도시 라파로 물밀듯이 쏟아졌다. 무너진 철제 장벽을 밟아 국경을 넘어서 라파에서 담배·식료품·치즈 등 기초 생필품을 사들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모습을 외신이 전했다.
생필품 구하려 이집트 국경 폭파
이집트 국경을 폭파한 것은 가자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6월 총선에서 승리한 뒤 가자지역을 장악한 하마스는 수차례 이집트의 철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해왔다. 지난해 6월부터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봉쇄작전을 펼치면서 지역 경제가 파탄나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유엔 산하의 세계식량계획(WEP)이 1월 10일 가자 주민 3분의 2에 해당하는 32만여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밝히는 등 가자의 경제 상황은 절박함 그 자체다.
상황이 한층 악화한 것은 18일 이후였다. 이스라엘은 가자지역 팔레스타인인의 박격포 공격을 이유로 가자지구로 진입하는 통행로를 완전 봉쇄했다. 봉쇄조치 이틀 만에 연료가 부족해 발전소가 멈춰서면서 가자지구는 암흑 천지로 변했고, 난방이 중단돼 주민들은 추위에 떨었다. 병원 기계를 돌리지 못해 환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상황까지 발생하면서 국제 사회의 비난이 빗발치자 이스라엘은 봉쇄조치 나흘 만인 지난 22일 발전소 연료와 의약품 등을 반입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국경 사이를 500m에 이르는 ‘안전지대’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가자지구 주민들이 숨통을 틀 수 있는 방법은 이집트와 국경이 유일했다. 이집트와 사이에 세워진 높이 10m, 길이 12㎞의 철제 장벽이 붕괴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실패한 이스라엘의 가자 고립정책
이스라엘이 가자에 대한 전면 봉쇄 조치를 취한 것은 하마스를 고립시키려는 목적에서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정치적 균열을 이용해 강경파인 하마스 세력을 일소하겠다는 전략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2005년 파타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한 압바스 수반이 사망한 야세르 아라파트 전 수반의 뒤를 이었으나, 1년 만에 치른 총선에서 하마스에게 완패했다. 그러나 파타당은 총선 뒤에도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 양 정당 간 권력 다툼으로 결국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통치하게 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검문소 5곳을 봉쇄하고 이집트에도 국경 봉쇄를 철저히 당부했다. 이집트를 통해 가자지구로 각종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반면 압바스 수반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경제 원조도 했다. 미국과 국제사회도 거들었다. 미국은 지난해 압바스 정부에 1억9000만 달러의 지원을 약속했고, 국제사회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팔레스타인에 최소 7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약속하면서 자금 관리를 압바스 수반이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 국경 장벽 붕괴 사태로 이스라엘의 전략은 사실상 역풍을 맞았다. 이집트 국경 장벽이 붕괴되면서 가자지구에 대한 참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스라엘에 봉쇄 철회를 요청했다. 아랍 연맹은 지난 21일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 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할 것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촉구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마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라파로 들어오는 것을 묵인하면서 이스라엘에 가자 봉쇄조치 해제를 요청했다. 결국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27일 “인도적 참상을 막기 위해 식량, 의약품, 연료 등에 대한 반입 금지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마스는 가만히 앉아서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면서 통치권도 강화하게 됐다.
어두워진 이·팔 미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은 더 어려운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압바스 수반이 머리를 맞대고 평화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을뿐더러 설사 협상이 체결된다고 하더라도 이행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팔 평화 협상안’에서 서안 지대의 유태인 정착촌을 철거하는 대신 압바스 정부가 하마스를 통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압바스 수반은 하마스를 제압할 능력이 없다. 공공연히 “압바스와 부시의 어떤 합의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는 하마스는 이번 국경 붕괴 사태를 통해 가자지구에서 통치권을 한층 강화했다. ‘반쪽짜리 대통령’ 압바스 수반의 대표성이 한층 더 약해졌다는 뜻이다.
만일 압바스 수반이 핵심 쟁점인 예루살렘을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협상을 할 경우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저항이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하다. 가자지구와 서안 사이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 수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6월 팔레스타인 정당 간 다툼 때문에 깨진 ‘통합 자치정부’를 우선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균열을 봉합한 뒤 팔레스타인 전체를 대변하는 대표가 이스라엘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도 쉽지 않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분쟁 중재자인 미국도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이 올해 안에 평화 협상 타결을 이끌어내겠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아랍권에서 이를 기대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양측의 분쟁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가 줄기를 바랄 뿐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브첼렘’은 지난 한 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유혈 충돌로 이스라엘인 13명, 팔레스타인인 373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희생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AFP통신은 지난해 11월 부시 대통령 중재로 애너폴리스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이 재개된 이후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115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국제부┃김정선 기자 kjs043@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