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석학 이태규, 우장춘, 리승기 ‘세 갈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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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은 어려운 시절의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품종개량에 몰두했고, 이태규는 고국을 떠났지만 유타대학에서 많은 수의 한국인 유학생을 받아 지도하였다. 그리고 리승기는 더 나은 연구환경을 찾아 북한행을 결심했다

화학자 이태규(1902∼1992)의 88세 생일 기념으로 제자들이 펴낸 <이태규 박사 전기>(1990)에는 세 명의 한국인 과학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이 교토제국대학에 재직하던 이태규를 방문하여 찍은 것이다. 사진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또 한 명의 참석자는 역시 교토에서 활동하던 화학공학자 리승기(1905∼1996)다. 리승기는 1931년 교토제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교토제대 부설 화학섬유연구소에서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닐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39년 교토제대 공업화학과의 교수 자리에 올랐다.

「이태규 박사 전기」(도서출판 동아, 1990) 124쪽에 실린 사진. 우장춘(왼쪽)은 1937년 9월 교토 다카이 종묘 연구농장장으로 부임했고,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태규(가운데)가 1938년 12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양자역학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으므로 이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월북 과학자인 리승기의 이름은 빠져 있다. / 필자 제공

「이태규 박사 전기」(도서출판 동아, 1990) 124쪽에 실린 사진. 우장춘(왼쪽)은 1937년 9월 교토 다카이 종묘 연구농장장으로 부임했고,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태규(가운데)가 1938년 12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양자역학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으므로 이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월북 과학자인 리승기의 이름은 빠져 있다. / 필자 제공

세 명의 과학자가 함께 찍은 사진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이공학계 교수가 된 것은 이태규와 리승기 단 둘뿐이었다. 1945년까지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이공학계(농학 포함) 박사학위를 받은 ‘조선인’은 이 둘을 포함, 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다. 세 사람은 1945년 이전 한국의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에 모인 세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대화의 언어는 일본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태규와 리승기는 오랜 유학생활 덕에 일본어를 잘했고, 반대로 우장춘은 한국어를 못했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협력한 과오 때문에 일본으로 달아났고, 1903년 그의 죄를 물으러 온 고영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사후 남은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우장춘은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었다. 일본에서 그는 조선인의 후예, 그것도 일본이 드러내기 껄끄러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망명 조선인의 후예였다.

일제가 패망한 뒤 재일조선인인 그의 위치는 더욱 애매해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그의 명성을 흠모하는 이들이 1947년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의 귀국을 청원하기 시작했다. 거듭된 권유에 우장춘은 1950년 3월 한국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를 위해 살았으니 앞으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살겠다”는 말과 함께 한국에 건너왔다고 우장춘이 바로 ‘한국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우장춘을 처음 대면했을 때 맨먼저 던진 말은 “자네가 우범선의 아들인가?”였다고 한다. 우장춘이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것을 두고 문제 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체성의 문제는 이태규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태규는 1920년 도일하여 오랜 유학생활 끝에 일본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던 제국대학 교수 자리에 오르면서, 청·장년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냈다. 따라서 그와 가족의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일본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의 초대 문리대 학장이 되자, 그와 같은 생활습관은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일명 ‘국대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태규와 가족들이 “집에서 일본옷을 입고 일본말을 쓴다”는 말을 퍼뜨리며 비난하였다. 교토제대에서 함께 연구했던 제자들 중에서도 그와 뜻을 달리하고 서울대를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이태규는 인간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고, 한국을 떠나 미국 유타대학으로 향했다.

한편 리승기는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대 공대의 초대 학장이 되었고, 역시 서울대 개교 과정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리승기는 한국전쟁 초기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김일성의 친서에 설득당하여 북한행 기차에 올랐다. 당시 남한에는 별다른 중공업 설비가 없었던 데 비해, 북한에는 함경남도 흥남에 일본 자본이 조성한 대규모 화학공업단지가 남아있어서 그가 꿈꾸었던 합성섬유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규 전기 속 사진에는 세 사람이 나와 있지만 거기 딸린 설명에는 이태규와 우장춘, 두 사람만 소개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행보를 쉽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들의 엇갈린 행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가령 “이태규는 고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갔으니 애국심이 부족하고, 우장춘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으니 노력이 부족하고, 리승기는 북한으로 간 것을 보니 공산주의자였다”는 식으로 쉽게 재단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연은 한두 가지 측면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우장춘은 어려운 시절의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품종개량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그의 외국행을 막았다. 그 바람에 우장춘은 아버지의 나라에 발이 묶여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1959년 그의 병세가 심해졌을 때에도 그의 자녀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태규는 고국을 떠났지만, 유타대학에서 많은 수의 한국인 유학생을 받아 지도하였다. 1960∼80년대 한국 기초과학계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유타에서 공부한 이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1973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석좌교수로 한국에 돌아왔다.

리승기는 더 나은 연구환경을 찾아 북한행을 결심했고, 그가 만든 비날론이 북한에서 ‘주체섬유’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두면서 북한 과학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다른 길을 간 옛 친구를 잊은 것은 아니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리승기가 그와 마주친 자리에서 “이태규 박사는 잘 계시냐”고 안부를 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태규의 전기에 실린 세 과학자의 사진도 이태규가 리승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반공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1990년에 ‘리승기를 리승기라 부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셋이 함께 실린 사진을 넣었던 이태규의 마음은 이념이나 체제로는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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