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세상을 바라보고 만족했던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시간도 십이진법에서 십진법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하루를 10시간으로, 1시간을 100분으로, 1분을 100초로 새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숫자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동물들도 간단한 수를 헤아릴 수 있지만, 숫자라는 기호와 그것을 토대로 쌓아올린 수학이라는 체계는 인간이 서로 약속하여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숫자와 수학으로 표현되는 자연현상은 엄연히 실재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규칙과 과정은 인간의 문명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숫자를 다루는 규칙은 문명에 따라 나름대로 특색있게 발전해 왔다. 인간의 손가락이 열 개여서인지 대부분의 문명이 십진법을 바탕으로 삼기는 했지만, 숫자를 세는 이름 등을 살펴보면 미묘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십’ 다음에 ‘십일’과 ‘십이’가 이어지는 식으로 십진법 체계가 일관되게 숫자 이름에도 적용되고 있다.
반면 유럽 쪽의 숫자들은 (영어를 예로 들면) 열(ten) 다음에 열하나(eleven)와 열둘(twelve)까지 고유의 이름이 있고, 열셋(thirteen)에서 스물(twenty)까지도 뜻은 유추하여 짐작할 수 있지만 역시 고유한 이름을 쓴다. 십이진법이나 이십진법을 섞어 쓰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어를 익힐 때 아흔아홉을 ‘네 개의 스물과 열아홉(quatre-vingt-dix-neuf)’이라고 표현하는 걸 배우고 화들짝 놀라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수 세는 법에도 스물을 단위로 삼는 오래된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떻게 단위를 나눌 것인가
이렇게 몇 가지 진법을 섞어 쓰던 관습은 화폐 단위나 도량형 등에 오늘날까지도 흔적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교류가 적을 때에는 지역마다 화폐 단위와 도량형이 제멋대로였다. 따라서 중국의 진나라부터 독일의 제1제국까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각종 단위들을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영국 화폐의 예에서 보듯 어떤 단위들은 퍽 오랫동안 살아남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1파운드가 100펜스로 정리되었지만, 1971년까지도 실링(파운드의 20분의 1)과 (구)펜스(실링의 12분의 1) 같은 단위가 남아있었다. 심지어 기니(21실링)와 같은 기묘한 단위까지 섞어 쓰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은 오늘날까지도 미터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피트(약 30㎝)와 인치(12분의 1피트)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체계에 넌더리를 낸 계몽주의자들이 모든 단위 체계를 십진법 위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온 유럽을 상대로 싸우는 와중에 과학자들을 파견하여 지구 둘레를 측정하고 미터법을 만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터법은 지구의 둘레로부터 길이의 단위를 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피와 질량의 단위까지 모두 하나의 십진법 체계 안에 아우른다는 점에서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한 계획은 항상 허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미터법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세상을 바라보고 만족했던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시간도 십이진법에서 십진법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하루를 10시간으로, 1시간을 100분으로, 1분을 100초로 새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소수점으로 표시하는 등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생긴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터법과는 달리 십진법 시간 체계는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몇 번의 개편 끝에 결국 취소되었다.
왜 시간에서는 60이라는 숫자가 살아남은 것일까? 명확한 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 심성에 비추어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우선 십진법만을 고수하면 인간에게 2나 5만큼이나 중요한 숫자인 3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10이나 100의 약수에는 3이 없기 때문에 ‘한 시간의 3분의 1’을 깔끔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60은 여러 번 더하거나 곱하면 깔끔한 숫자가 나오지 않지만 반대로 나눌 때에는 2, 3, 4, 5로 모두 나누어지므로 쪼개어 이야기하기 편리하다. 12도 2와 3을 모두 약수로 두고 있어 일상 감각에 맞추기 편리하다.
또한 인간의 감각으로 100은 60에 비해 너무 많거나 큰 숫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십진법으로 “5.75시에 만나”라는 말은 “오후 12시45분에 만나”라는 말과 같은 뜻이지만 한 시간을 100으로 나누어 ‘0.03시’나 ‘0.89시’까지 따지는 것은 너무 자잘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인간의 규모에서 60이라는 숫자
나이로 이야기하면 60과 100이 주는 느낌의 차이는 더욱 크다. 동북아시아에서 보통 수를 셀 때는 일찍부터 일관된 십진법을 썼지만, 해나 나이는 10간과 12지를 조합하여 60년 주기로 세는 관습이 뿌리내린 것도 이 감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백세는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환갑(還甲)은 현실에서 내가 바랄 수 있는 복이니, 사람 나이를 셀 때에는 100년보다 60년을 한 주기로 삼는 편이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모든 단위나 주기는 순환을 전제로 한다. 십진법도 10개의 숫자를, 이진법도 2개의 숫자를 순환하며 돌려쓰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범위에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순환을 마친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해(癸亥)는 60갑자의 맨 마지막이지만, 관점을 바꾸면 임술(壬戌)의 뒤이자 갑자(甲子)의 앞에 오는 하나의 간지일 뿐이다. 그래서 환갑잔치는 60년을 살아냈음을 축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새로 시작해 더 오래 갈 것이라는 축원도 겸한다.
이렇게 하나의 순환을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여러 문명에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 또는 노인이 회춘하는 것과 곧잘 비교됐다.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피부를 얻는 것을 다시 젊어지는 것으로 오인했던 옛사람들은 이 순환의 비유에 뱀을 결부시켰다. 서양 연금술사들이 중요하게 여긴 ‘오우로보로스(ouroboros)’라는 상상의 동물은 자기 꼬리를 입으로 물고 원을 만든 뱀(또는 용)의 모습인데, 바로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는 영원한 순환을 상징한다.
숫자도 인간이 만든 것일진대, 그것의 순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제 논에 물 대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나의 매듭을 지으려면 기왕 인간이 의미를 얹어준 숫자가 다른 숫자보다는 더 나은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리라. 매듭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듯이.
‘구석구석 과학사’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김태호(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