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아이콘, 서태지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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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같은 풍경이 계속됐다. 쉬는 시간만 되면 많은 아이가 발을 끌며 팔을 내지르는 동작을 흉내 내기 바빴다. 선생님의 시선이 벗어난 곳이면 교실, 복도 할 것 없이 어디든 춤판이 벌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부르며 선보인 ‘회오리 춤’은 학교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이라면 마땅히 습득해야 할 신문물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 무대를 밟은 지 단 이틀 만에 일어난 현상이다.

젊은 친구들을 매료한 것은 춤뿐만이 아니었다. ‘난 알아요’는 오케스트라 히트와 신시사이저, 묵직한 전기기타를 앞세운 역동적인 반주로 짜릿함을 안겼다. 후렴은 선명한 멜로디를 지녀서 빠르게 인식될 수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 없이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우리말 래핑도 신기했다. 음악에 전혀 관심 없는 특이하거나 엄숙한 몇몇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연신 ‘난 알아요’를 흥얼거렸다. 1992년 전국의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장기자랑은 ‘난 알아요’로 범람했다.

1996년 1월 31일 은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 김영민 기자

1996년 1월 31일 은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 김영민 기자

그룹이 착용한 옷과 액세서리는 거리 곳곳을 물들였다. 번화가에 가면 상표를 떼지 않은 모자를 쓴 청소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차림새가 서태지와 아이들에 의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하여가’로 활동할 때 입었던 모자 달린 셔츠, 큰 사이즈의 배기팬츠도 크게 유행했다. 이태원이나 동대문의 많은 옷가게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선보인 옷을 들여놨다. 스톰, 펠레펠레, 보이런던 등 그룹의 의상을 협찬한 브랜드들의 매장은 젊은이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언론이 서태지를 두고 ‘문화 대통령’이라 칭한 이유가 일련의 현상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화려한 춤, 색다른 패션 등 외적인 면도 근사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이 훌륭했다. 신스팝(‘내 모든 것’), 테크노(‘환상 속의 그대 Part III’), 힙합, 헤비메탈, 국악의 퓨전(‘하여가’), 얼터너티브 록(‘발해를 꿈꾸며’), 랩 메탈(‘교실 이데아’)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면서 언제나 탄탄한 완성도를 내보였다. 이만큼 변화무쌍하면서도 내용이 실한 작품을 들려준 음악가는 국내에 얼마 없다.

가사 또한 남달랐다. ‘발해를 꿈꾸며’에서는 조국의 분단 현실을 언급하며 통일 문제를 환기했고, ‘교실 이데아’를 통해서는 제도교육에 억눌린 청소년들의 불만을 대변했다.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로는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했으며, ‘컴 백 홈’(Come Back Home)으로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가정사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로했다. 음반사전심의제도의 폐지를 거든 ‘시대유감’은 부패를 일삼는 기득권을 향해 날린 시원한 냉소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사회성과 저항성을 노래로 나타낸 몇 안 되는 주류 스타 가수 중 하나다.

때로는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난 알아요’는 표절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컴 백 홈’은 스타일 모방이 지나쳤다. ‘컴 백 홈’의 일부 춤동작은 미국 힙합 듀오 큐오(Quo)가 췄던 춤을 베낀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찾아온 아쉬움도 음악으로 누그러졌다. 매번 쇄신을 거듭했으며 견고함을 동반했다. 앨범 수록곡의 분량이 EP 수준이었음에도 전혀 허전함이 들지 않았던 것도 음악이 신선미와 구조적 건강함, 철학과 독자적 표현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의 노래들은 모두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칭송할 수밖에 없다.

<한동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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