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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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대학에 다녀왔다. 제법 긴 여행을 떠날 때 누구나 서너 권의 책을 가져가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벗이 된 책들은 A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예란 테르보른의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아담 자가예프스키(Adam Zagajewski)의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최성은·이지원 옮김, 문학의숲)였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타인의 /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아담 자가예프스키 시집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 2012 문학의숲

아담 자가예프스키 시집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 2012 문학의숲

자가예프스키의 시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의 첫 부분이다. 이 시는 1982년 출간된 시집 <다수를 위한 찬가>에 발표됐고, 시선집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에 다시 실려 있다. 자가예프스키는 노벨문학상 작가인 체스와프 미워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뒤를 이어 오늘날 폴란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 고은과 함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서울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고간 여행에서 자가예프스키의 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타인 또는 타자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굳이 강조할 필요 없이 타자의 발견과 성찰은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기여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타자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는 어떤 사회이든 일차적인 과제다. 그러기에 카를 마르크스와 에밀 뒤르케임으로 대표되는 고전 사회학자들은 비록 정치적 이념의 지향이 달랐지만, 타자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적 연대(solidarity)를 누구보다 중시했다.

타자에 대한 사회학적 기여 중 특히 주목할 것은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의 이론이다. 푸코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정상인과 비정상인, 서구인과 비서구인 등 이제까지 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배제돼 온 후자의 그룹이 곧 타자다. 그는 이러한 타자들을 다루는 기존 지식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선물하는 것을 평생 자신의 학문적 과제로 삼았다.

고전 사회학자들처럼 사회의 조정원리인 연대를 중시하든, 탈구조주의자 푸코처럼 소수자들의 인권을 주목하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최대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로서의 사회 위기다. ‘20대 80 사회’, ‘모래시계형 사회’, 최근의 ‘1대 99 사회’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소수의 승자들 뒤편에 다수의 패자들이 가려져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공동체의 이러한 위기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와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을 특권화함으로써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경쟁력을 갖춘 사회적 강자들은 전 지구를 무대로 삶의 여유를 누려 왔지만,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은 삶 전체를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경쟁력 증진에 헌신해 왔다.

사회는 개인들의 계약에 기반을 두는 공적 조직인 동시에 그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사진은 저소득층 가구들에 연탄을 배달하는 자원봉사단체 회원들. | 김영민 기자

사회는 개인들의 계약에 기반을 두는 공적 조직인 동시에 그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사진은 저소득층 가구들에 연탄을 배달하는 자원봉사단체 회원들. | 김영민 기자

돌아보라. 일상화한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위기, 자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교육비 증가,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적응 압박 등이 강제한 불안감과 열패감이 우리 시민문화의 기본 코드이지 않은가. 이른바 대박주의, 영웅주의의 등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쟁의 사다리를 단숨에 올라설 수 있는 대박에의 꿈, 곤궁한 현실을 일거에 벗어나게 할 영웅에의 기대가 일상 문화의 또 다른 코드를 이뤄 왔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경쟁 원리가 우리 시민사회를 관통하여 ‘이기적 시민사회’를 재생산해 왔다는 점이다. 이기적 시민사회란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적·사회적 활동이 무엇보다 개인 및 소속집단을 위한 화폐와 권력을 획득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두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사회를 말한다. 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는 경쟁을 극단화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약화시키고, 결국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존재 조건을 위협한다.

사회는 개인들의 계약에 기반을 두는 공적 조직인 동시에 그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네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의 응답은 공동체로서의 사회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조건이다. 그 원인이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이기심에 있든, 앞서 말했듯 신자유주의가 강제해온 지나친 경쟁에 있든 우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갈수록 지속불가능한 공동체가 돼가고 있다는 점이다. 타자 또는 타인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사회를 더 이상 사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를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연대가 어우러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게 시민 다수가 꿈꾸는 사회의 모습이건만, 정작 우리 현실은 그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에선 개인의 자율성이 지나친 경쟁으로 위협받고, 다른 한편에선 공동체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연대마저도 여지없이 훼손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정직한 자화상이다. 이 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정신은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연대를 공존시키고 결합하는 ‘연대적 개인주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가예프스키의 삶은 전후 폴란드의 역사와 함께 진행돼 왔다. 권위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서유럽에로의 망명, 폴란드의 민주화로 인한 귀향이라는 개인적인 삶의 궤적이 그의 시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폴란드인이지만, 동시에 국경과 이념을 넘어서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세계시민이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은 폴란드인과 세계시민 모두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대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공항버스로 향하는 여행객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기사들, 남자들, 여자들, 노인들, 어린이들, 그리고 동남아 언어들을 쓰는 외국인 노동자들. 무수한 이 땅의 사람들이, 자가예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아름다운 타인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 역시 성큼 그 대열에 합류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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