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왜 창공 위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가는 것이지.”
1888년 6월 동생 테오에게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짧지만 강렬했던 인생을 살다간 고흐는 현대 서양화가의 대명사다. 예술을 다루는 이 기획에서 미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 말문을 열까 고민하다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명하다.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삶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 고흐만큼 이 둘이 극적으로 결합된 사례는 없다. <별이 빛나는 밤>의 검푸른 밤하늘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달과 별처럼, 예술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은 현대인의 삶이 직면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시민적 시선에서 <별이 빛나는 밤>은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쓸쓸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꿈과 희망을 밤하늘 별들의 고독하지만 빛나는 향연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사회의 물질적 성장이 물론 평등한 분배를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사회·경제적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쓸쓸함, 외로움, 혼란스러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느낌이 커져온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사진은 출근길의 시민들. | 홍도은 기자
이 작품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 자아, 정체성이 처한 상황이다. 적지 않은 이들은 현대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는데도 정신적으로는 더 빈곤해졌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의 물질적 성장이 물론 평등한 분배를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사회·경제적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쓸쓸함, 외로움, 혼란스러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느낌이 커져온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사회학에선 이에 대해 많은 토론이 이뤄져 왔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를, 막스 베버는 합리화가 가져온 ‘쇠우리’를, 위르겐 하버마스는 체계의 과도한 발전에 따른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이야기했다.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님을 문득 깨달았을 때 우리 인간의 정체성은 위기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자기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모색하게 한다.
고흐의 작품이 사회학적으로 의미를 갖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풍경화든 인물화든 그가 화폭에 담고자 한 것은 자기의 느낌과 생각, 바로 자신의 삶이었다. 대상의 완벽한 재현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화가의 내면 풍경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는 인상주의를 넘어서고 현대 회화의 길을 개척했다. 고흐 작품이 갖는 지속적인 울림은, 끝없는 고투(苦鬪) 속에 그려낸 풍경과 인물에서 그가 견뎌낸 고독의 삶을 떠올리고, 그 삶이 다시 감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공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흐는 밤하늘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 외에도 <밤의 카페 테라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걸어가는 사람들, 마차, 사이프러스, 별과 초승달이 있는 길> 등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을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이 유독 많은 관심을 끈 것은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을 고흐 특유의 방식으로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이 작품은 생레미 요양원에 입원했던 1889년 6월에 그려졌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대표적인 소장품이다. 오래 전 뉴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 역시 이 그림을 보러 갔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바티칸박물관의 <최후의 심판>, 프라도박물관의 <시녀들>처럼 <별이 빛나는 밤>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둠에 잠긴 마을, 하늘을 향해 뻗은 사이프러스와 함께 달과 별이 너울거리며 휘몰아치는 밤하늘의 살아 있는 풍경은 현대사회 속에 내던져진 정체성의 고독한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 주요 원인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자본주의로부터 가해지는 구조적 강제다. 경쟁에서 뒤처지고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 삶을 메마르게 하고, 결국 인간성을 파괴시킨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와 정보사회가 주는 충격이다.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은 삶의 기본 틀을 이루는 시·공간을 변형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1889·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주목할 것은 이런 구조 중심적 시각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갖게 되는 어떤 불만이다. 구조 중심적 시각에선 제도를 바꾸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제도를 개혁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개혁은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필수조건일 따름이다. 우리 정체성은 실로 다양하고, 그러기에 개별적 특성을 고려하는 배려가 요구된다.
최근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치유 담론들이 넘치는 것은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개인 중심적 시각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주체의 의지와 자기계발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이 역시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치유 담론이 상처받은 이들에게 분명 위안을 제공하지만, 제도개혁을 고려하지 않는 그 위안이 냉혹한 현실 속의 삶에 지속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시대에 상처받은 이들을 회복시키고 치유하기 위해선 일종의 이중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인간성을 위협하고 상실시키는 제도들에 대한 적극적 개혁은 더없이 중요하다. 더불어 일상의 소중함, 작은 실천의 중요성, 이념·도그마·허위의식에 의해 휘둘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기반해 삶을 조직하는, 그리하여 훼손된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체성의 정치’ 또한 진지하게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우리 사회는 이미 도달해 있다.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1890년 7월 고흐가 사망할 당시 지니고 있던 부치지 못한 편지의 한 구절이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자살로 마감한 그의 삶은 더 없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들은 우리 삶과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을 안겨준다. 진정한 삶이란 밤하늘에 빛나는 저 별들에게로 가는 길, 스스로에게 위안과 힘을 주는 용기를 갖는 동시에 그 용기를 가로막는 제도들을 개혁하려는 집합의지를 발휘하는 길일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