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지금 이 글을 나는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에 와서 쓰고 있다. 지난 월요일 오후 인천공항을 떠나 월요일 오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문득 떠오른 소설의 한 구절이 있었다.

“이 나라에 입국한 이래, 사람은 관념의 세계시민은 될 수 있어도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세계시민이 될 수 없다는 실감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화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몇 해 전 최인훈이 전집을 낼 때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화두>에 대해 내가 쓴 글을 제1권의 뒤편에 김병익의 글과 함께 해설로 싣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였다는 점에서 반갑고 뜻 깊은 일이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걸개가 서울 광화문 주한미대사관에 걸려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걸개가 서울 광화문 주한미대사관에 걸려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 20세기 우리나라의 소설가 중 최인훈이 최고의 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분단을 다룬 최인훈의 <광장>이 해방 이후 가장 문제적인 소설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다.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이라는 그의 관찰은 해방 이후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 모더니티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현실을 보는 예술가의 태도다. 지식인 집단에서 예술가의 미덕은 이중적이다. 개별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통찰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이가 예술가다. 최인훈은 예술가의 예리함과 포괄성을 동시에 겸비한 이례적인 작가다. <화두>는 이러한 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화두>는 자서전적 소설이다. 고등학교 때 체험한 글쓰기의 소명의식과 자아비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출발한 소설가로서의 개인적 삶이 20세기 후반 한국과 세계의 현대사와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1권이 미국에서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면, 제2권은 작가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조명희를 찾아 떠난 소련 여행을 다루고 있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화두>에서 내가 주목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화두>에서 자본주의는 미국으로, 사회주의는 러시아로 대표된다. 그리고 이 질문의 주체는 허공 속의 존재가 아니라 비서구사회에서, 그것도 식민지를 경험하고 분단된 국가에서 성장한 개인적인 동시에 민족적인 자아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이제 <화두>의 주인공 최인훈이 되어 이 질문에 답을 구한다.

독자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1권이다. 아이오와, 버지니아, 그리고 콜로라도 덴버를 오가던 소설가의 생활은 미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세운 이 독특한 나라의 다양한 모습을 최인훈은 때로는 현미경의 시각에서, 때로는 망원경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기록한다. 미국이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 최근 북핵위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우방이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서양의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대명사인 국가가 미국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모델이 아닌 유럽식 모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란 여전히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뜻한다.

1993년도 베스트셀러 최인훈의 ‘화두’ 표지. | 경향자료 사진

1993년도 베스트셀러 최인훈의 ‘화두’ 표지. | 경향자료 사진

우리에게 미국이란 변수는 그냥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가까운 변수였다. 우리를 고민하게 해온 것은 미국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미국과의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시민사회 안에서 반미의식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친미의식과 반미의식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혼재돼 있다. 공적 영역에서는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사적 영역에서는 미국을 선망하는 이중적 의식이 우리 사회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미국에 대한 이런 복잡한 인식은 한·미관계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쳐 왔다. 보수세력이 일관되게 강조해온 한·미동맹 강화론과 이에 맞서 진보세력이 내세운 동북아 시대론 사이에 놓인 거리는 미국에 대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인식 및 태도의 차이를 적절히 보여준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미국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하나의 미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화당의 미국과 민주당의 미국, 폭스 TV의 미국과 뉴욕타임스의 미국, 월스트리트를 활보하는 여피 뉴요커의 미국과 시간당 10달러 급여를 받는 월마트 노동자의 미국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나라에도 빛과 그늘이 존재한다.

더불어, 우리 사회가 미국에 대해 좀 더 지혜롭고 당당하게 대응함으로써 국익을 극대화하기를 국민 다수가 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을 무조건 찬미할 필요도, 일방적으로 비판할 필요도 없다. 국제관계의 차원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현실적인 국가이익과 규범적인 지구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최인훈식 어법으로 말하면, 현실의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선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 대한 더욱 객관적인 인식과 이에 기반한 균형 잡힌 실천이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낙동강 700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소설 <화두>를 여는 조명희 <낙동강>의 첫 구절이다. 러시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어느날 밤 최인훈은 이 문장을 적어넣음으로써 <화두>가 시작됐다고 말하면서 소설을 끝낸다. 지금 나는 이 구절을 읽어보며, 바다로 향해 가는 강과도 같은 유장한 삶에서 최인훈이 간직해온 화두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소설가 최인훈에게 화두는 굴곡 많은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개인적·민족적 자아의 발견이다. 그래서 그는 분단의 역사를, 자본주의의 미국을, 사회주의였던 러시아를 헤맸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새롭게 쓴 서문에서 최인훈은 “‘기억’은 생명이고 부활이고 윤회”라고 말한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며, 다가올 미래를 예고한다. 지난 20세기의 역사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할까? <화두>는 그 성찰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