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주는 '쌍둥이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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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야기]병 주고 약 주는 '쌍둥이 물질'

시내 한복판 대로변에서 대여섯 살 정도의 꼬마 둘이 엄마의 양쪽 손을 잡아끌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두 아이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닮았다. 일란성 쌍둥이다.

"너희들 정말 이럴거야? 항상 자기 고집만 부리고.... 한 가지만 결정해. 피자야? 햄버거야?" 엄마는 꼬마들의 의견 다툼에 당황해 거의 울상이었다.

제아무리 닮은 쌍둥이라 할지라도 취향은 제각각이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성격과 기호가 모두 다르다. 때문에 쌍둥이 엄마는 전혀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진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2배로 힘이 든다고 한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는 전혀 다른 말을 해대니 그럴 만도 하다.

과학자 중에서도 이런 쌍둥이 엄마의 애로를 십분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쌍둥이 엄마인 '화학자'이다.

화학자를 쌍둥이 엄마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합성물질은 항상 쌍둥이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쌍둥이가 완전히 100% 같지는 않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좌우가 완전히 대칭된 형태로 나타난다. 한 아이가 오른쪽 뺨에 점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아이는 왼쪽 뺨에 점을 가지고 있는 격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광학이성질체(키랄물질-거울이성질체)라고 부른다.

화학구조 같되 모양에서 대칭성

키랄은 그리스어로 손을 의미한다. 오른손과 왼손처럼 모양은 같지만 좌우대칭성을 지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광학이성질체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학구조식은 물론이고 밀도-녹는점-끓는점까지 완벽하게 같지만 편광된 빛을 조사하면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물질이 있는데 이를 광학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졌다 하여 광학이성질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울이성질체도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오른손과 왼손처럼 거울에 비친 듯 대칭성을 띤다는 뜻에서 붙였다.

[과학이야기]병 주고 약 주는 '쌍둥이 물질'

광학이성질체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꽤 오래 전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화학자 파스퇴르가 포도주의 쓴맛을 내는 성분을 조사하다가 포도주의 한 성분인 타르타르산의 결정 중에 한쪽 방향으로만 빛을 반사하는 물질을 발견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 흥미로운 발견을 토대로 물질에는 광학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광학이성질체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된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발견은 화학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빛을 반대 방향으로 반사시킨다는 이외에 뚜렷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당시 신경안정제로 개발된 '탈리도마이드'라는 약품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약은 약효가 탁월해 임신부의 심한 입덧을 완화하는 약으로까지 사용됐다.

[과학이야기]병 주고 약 주는 '쌍둥이 물질'

이밖에도 광학이성질체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추가로 속속 보고됐다. 인공 감미료로 쓰이는 아스파탐도 한쪽 방향의 물질은 단맛을 내지만 반대 방향은 오히려 쓴맛을 내는 사실이 확인됐다. 즉 광학이성질체의 한쪽은 '약'이지만 다른 반대쪽은 '독'이거나 혹은 전혀 약효가 없는 쓰레기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의약계는 발칵 뒤집혀졌다. 파스퇴르가 주장한 광학이성질체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뤘고, 제약회사들은 앞다투어 이성질체 중 쓸모없는 물질을 제거 혹은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포항공대 김기문 교수 방법 주목

[과학이야기]병 주고 약 주는 '쌍둥이 물질'

우리 화학계에서도 많은 화학자가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포항공과대학 김기문 교수는 나노기술을 이용한 독특한 분자채로 광학이성질체의 분리 방법을 제시했다. 김 교수가 제안한 방법은 오른쪽이면 오른쪽, 왼쪽이면 왼쪽 방향의 물질만이 통과할 수 있는 특수한 채를 만들어 걸러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복잡한 화학공정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광학이성질체를 분리할 수 있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실험실 단계에 머물러 있고 실제 약품 생산공정에 적용되기까지는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아직까지는 완벽하다고 할 만한 분리 방법도 등장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 방법을 자연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화학물질을 인공적으로 합성할 때 항상 왼쪽과 오른쪽 물질이 1 대 1로 합성되니 자연계에도 다른 성질을 가지는 광학이성질체가 정확히 반반씩 존재해야 하련만 이상하게도 자연계에는 한 방향의 물질이 압도적이다. 사람이 먹는 탄수화물이나 아미노산도 마찬가지이고 몸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물질도 항상 한 방향만의 물질만이 만들어진다. 이 문제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화학자들은 이것이 자연이 선택적으로 한 방향의 물질을 생산하거나 고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지혜를 빌리면 고질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지영〈과학신문 기자〉 pobye200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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