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송년회에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회사 남자 후배가 소개팅에 나갔대. 한창 좋은 분위기에서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나 봐. 자기는 B형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더니 결국 흐지부지 됐대. B형 남자는 괴팍하거나 바람둥이라며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거야.”
옛날보다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관 짓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떤 혈액형은 성격이 어떻고 어떤 형은 어떤 점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심지어 서점에는 ‘혈액형별 투자법’이라는 책까지 나와 있다. 정말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걸까.
혈액형 발견해 노벨상 받다
혈액형 성격학은 1927년 일본의 다케지 후루카와라는 철학 강사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1970년대 일본 저널리스트 노미 마사히코가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쓰면서 다시 불붙었다. 1980년대에는 그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분석해 과학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혈액형을 처음 발견한 것은 1901년이다. 당시 수혈을 할 때 피가 엉겨붙으며 죽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칼 란트슈타이너는 혈액에 A, B, O형이 있다는 것과 서로 맞지 않는 혈액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로써 수혈에 일대 혁신이 이뤄졌고 그는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심리학자나 의학자들은 혈액형 성격학이 별자리 성격학처럼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실제 조사한 적도 별로 없고 혈액형이 성격을 좌우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외국에서 혈액형이 실제로 성격을 좌우한다는 연구가 나온 적이 있는데 과학자들 대부분은 그 연구에 대해 부정적이다. 사실 인간의 수많은 성격을 단지 4가지 혈액형으로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혈액형이란 무엇일까. 핏줄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에는 설탕과 비슷한 당분 물질이 사슬처럼 붙어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혈액형이 결정된다. A사슬(아세틸 갈락토사민)을 가진 사람은 A형, B사슬(갈락토스)을 가진 사람은 B형, A와 B사슬을 모두 가진 사람은 AB형,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O형인 것이다. 이 사슬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혈액형 유전자는 인간의 9번 염색체의 끝부분에 있다.
동물도 다양한 혈액형을 갖고 있다. 특히 개는 사람의 A, B형과 매우 비슷한 혈액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애완견은 수술할 때 혈액형에 맞춰 수혈해야 한다.
세균이 좋아하는 혈액형이 있을까
현대 과학에서는 오히려 혈액형이 질병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있었던 연구 결과, O형인 사람들은 콜레라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AB형은 거의 콜레라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이 병에 대한 저항성이 강했고 다음이 B형, A형 순서였다. 반면 O형은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성이 좀 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O형은 성병에 덜 걸리고 다양한 암에 걸릴 확률도 약간 낮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그의 저서 ‘게놈’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 대부분 O형인 것은 특별한 진화적 압력 때문에 A형과 B형 유전자가 소멸됐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지목한 진화적 압력은 ‘성병’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에 북부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뼈에서 같은 시대 유럽에는 없었던 성병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과학적으로 논란이 많아 단정하기 어렵다.
인종마다 혈액형의 분포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인 중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으로 모두 34%다. O형(28%), B형(27%), AB형(11%) 순서다. 일본인은 A형이 38%로 더 많지만 나머지 혈액형의 순서는 같다. 중국인은 O형이 42%로 가장 많지만 베이징 지역 중국인은 B형이 32%로 최고다. 반면 영국인은 O형이 47%, 프랑스인은 A형이 47%로 가장 많다. 유럽인은 동양인보다 B형과 AB형이 매우 적은 편이다. 유럽에서는 B형 인간이 살기 어려운 어떤 원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혈액형에 따라 잘 걸리는 병이 있는 걸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특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세포에 더 잘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 즉 세균도 혈액형이 있는데 자신과 혈액형이 비슷한 사람의 몸에서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면역세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 런던대 로버트 세이모어 박사팀은 “사람이 A, B, AB, O형의 4가지 혈액형을 일정 비율로 유지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방어를 좀 더 균형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O형은 바이러스 질병에 강하고 A, B형은 세균 질병에 더 강한데 두 가지 질병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 인류는 4가지 혈액형을 골고루 유지한다는 것이다.
혈액형의 진짜 역할이 밝혀진다면 성격을 추정하는 대신 자신이 잘 걸릴 질병에 대비하는 데 쓰일지 모른다. 다만 ABO식 혈액형은 수혈에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수십 개의 드러나지 않는 혈액형이 있다.
혈액형과 병의 관계를 명확히 알려면 각각의 혈액형과의 관계를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 혈액형과 병이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단지 O형이라는 이유로 어떤 병에 걸릴 확률이 100%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혈액형 성격학처럼 또 다른 유사과학이 될 것이다.
김상연<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