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지재권 보호?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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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각료회의서 유예 논의하려 했지만 무기한 연기… EU는 “지키자”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의 12월 15일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코로나19로 숨진 이는 534만명이다. 코로나19 감염사례는 2억7194만건에 달한다. 이 사이트에 올라온 일별 신규확진자 그래프는 지금까지 네 번 물결을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루와 마루 사이의 기간은 대략 4개월이다. 분기별로 코로나19가 인간 세상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오미크론 변이가 휩쓸고 있는 지금 일별 신규확진자 수는 다시 이전 파도의 높이만큼 올랐다. 지난해 백신이 개발되면서 2021년이 끝날 때쯤이면 팬데믹의 터널을 벗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이젠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출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변이 바이러스를 불러온 한 원인으로 백신 불평등이 꼽힌다. 백신 접종이 늦어지는 사이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올해 4월 인도에서는 델타 변이가, 11월에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처음 발생한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보고됐다.

Photo by Branˇ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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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지재권 면제로 변이 대응해야

공교롭게도 인도와 남아공은 지난해 10월 2일 세계무역기구(WTO)에 코로나19 예방·격리·치료를 위해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트립스)’상의 지적재산권 보호를 일시적으로 유예해야 한다고 처음 공동제안했다. 코로나19 종식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해법은 지재권을 유예해 백신 생산을 절대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는 올해 5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의 지지 서명을 담은 수정안을 냈다. 여기에는 진단키트와 치료제, 백신은 물론 의료장비와 개인보호구 등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모든 의약품과 의료기기에 관한 지재권을 일시 유예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이들은 최소 3년간 관련 지재권 보호를 유예하고, 이후 매년 그 연장 여부를 검토하자고 요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같은 달 백신 지재권 유예를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힘을 보탰다.

이후 각국은 세계무역기구의 트립스(TRIPS) 이사회를 중심으로 다자·양자회의를 열어 합의에 나섰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난 11월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열릴 예정이던 WTO 각료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려 했지만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지재권 유예안 논의의 모멘텀을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제네바를 베이스로 해 인도와 남아공, 유럽연합, 스위스 등의 국가를 중심으로 양자 협의를 계속하고 있고, 12월 16일 트립스 전체 회의를 비롯해 수시로 논의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의료전문가들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최홍조 건양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강력한 무기로 단시간에 바이러스를 억제해야 하는데 그게 간헐적으로 이뤄지거나 특정 인구 집단에 한정해 불평등하게 이뤄질 경우 바이러스 입장에선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 있어서 변이를 일으킬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고 말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부유한 국가들이 변이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부스터샷을 앞당겨 맞고, 한국도 원래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였다”면서 “부스터샷이 오미크론을 막을 수 있다는, 실험실 수준의 근거로 부유한 국가들이 백신을 독점하면서 새 변이가 나올 상황을 촉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신 지재권 보호? 유예?

지재권 ‘딜레마’ 상황 강조하는 EU

코로나19로 인류는 협력할 경우 서로에게 가장 이익이 되지만 개인적인 욕심으로 서로에게 불리한 상황을 선택한다는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동근 사무국장은 일국적인 대응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합의에 바탕을 둔 공동대응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내년 백신으로 이미 1억5000만개를 확보한 한국을 비롯해 선진국이 백신 접종을 독려하지만, 이는 일국적으로는 효과적이어도 결국 전 세계적 차원에서는 바이러스 변이를 통제하는 효율적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백신 지재권이 일시 유예되려면 합의제인 WTO의 의사결정 구조상 유럽연합의 반대를 넘어야 한다. 유럽연합은 지재권을 보호해 기업이 계속해서 백신 등 의약품을 개발할 동기를 해치지 않아야 미래의 보건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번 지재권 보호가 면제되면 향후에도 반복되면서 지재권 보호와 관련한 틀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표한다. 다만 백신 공급 확대가 시급하다는 점은 인정해 대안으로 특허의 강제실시를 내세우고 있다. 강제실시는 정부가 제3자에게 특허받은 상품 또는 제법을 특허권자의 동의 없이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특허의 강제실시를 할 수 있는 트립스협정의 유연성 조항을 각국이 알아서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의약품을 생산할 역량이 안 되는 나라는 강제실시를 허용해도 큰 의미가 없다. 의약품 생산이 가능한 나라가 강제실시를 해 이들 국가에 공급(수출)해야 하는데 특허를 보유한 국가나 기업의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어 실제 활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유럽연합은 특허만 풀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백신을 생산·유통·공급하는 인프라와 백신을 접종할 인력도 있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일견 일리 있지만 시민단체와 의료전문가들은 국제사회가 지재권 유예에 합의하면 인프라 문제도 해결이 빨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최홍조 교수는 “당장 지재권을 유예한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지만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기술 공유라든지 실제 저개발 국가에서 생산하고 보급할 수 있는 구조가 가능해진다”면서 “지금 당장 못하니 손 놓는 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서라도 백신 인프라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지재권을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동근 사무국장은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천부인권과 같은 엄청난 권리로 이해하는 국민 정서가 굉장히 강해지고 있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서 “유럽연합은 반대했지만 미국을 제외한 일본과 한국 등 부유한 국가는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한국만이라도 지재권 유예 지지 입장을 밝히면 문제 해결의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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