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사태가 2년째 이어지고 있다. 각종 위기 때마다 ‘대전환’의 시대를 맞았던 세계는 이번에도 크고 작은 변화에 직면해 있다. 마스크의 일상화, 사회적 거리 두기, 방역패스 활용 등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꿨다. 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코로나19 시대의 일상이 인류의 보편적 모습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변화는 사람들의 일상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이들의 모임인 국제질서 역시 본격적인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 무정부 상태라는 국제질서의 구조적 문제는 불확실성의 증폭과 맞물리며 종전 질서에 파열음을 만들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진행됐던 미중 전략 경쟁은 그 속도와 정도를 더해 가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해체다.
스스로 만든 질서 파괴하는 미국
냉전 종식 이후 형성된 미국 단극질서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었다. 세계화, WTO 등은 국제질서의 규칙으로 작동했고, 보호무역은 제소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며 동북아시아에서 부상한 중국이 미국이 만든 질서를 서서히 흔들기 시작했다. 중국은 민주주의, 자본주의(자유무역)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항하는 팍스 시니카 구축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트럼프 행정부의 선택은 미국이 만들어온 질서에서의 탈피였다. 미국 중심주의, 보호 무역주의가 강조됐고 중국과 날 선 비판과 규제를 주고받았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변화도 아니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등의 극우 지도자들이 집권을 이어갔다. 세계화가 초래한 국가 간, 사회 간 ‘불평등’이 자국 이익을 강조하는 ‘반세계화’ 세력을 추동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기조는 2020년 다시 뒤집혔다. ‘ABT(Anything But Trump·트럼프 빼고 전부 다)’를 내세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외교·경제·안보 정책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뒤집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 후 ‘동맹회복’, ‘민주주의’, ‘인권’, ‘자유’ 등의 가치를 역설했다. 그러나 미중경쟁의 현실과 코로나19의 장기화는 미국의 복귀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만들어온 질서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코로나19 대응에 전 세계가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각국은 코로나19 재유행이 발생할 때마다 먼저 국경부터 걸어 잠갔다. 선진국과 비선진국 간 백신 격차는 세계화의 민낯을 더욱 잘 보여준다. 오미크론 변이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견됐다. 지난 11월 30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서방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간 백신 접종률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디언이나 월스트리저널 같은 서구 주요 언론은 “오미크론 변이의 출현은 선진국들이 백신 제공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탓”이라고 지적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자유주의 회복을 외치는 미국의 행보를 구속한다. 이미 미국은 전략자원 확보를 이유로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요구한다. 특히 공급 부족 사태를 겪는 반도체 부분이 핵심으로 꼽힌다.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공급망 정보를 제출해야 했다. 삼성, SK 등의 국내 기업 역시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향후 5년간 520억달러(약 61조3000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산업지원법 대상을 인텔 등의 자국 기업에 한정할지 동맹국 기업까지 확대할지 결정하지 않고 있다. 삼성이 미국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0조원)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과 대비되는 행보다.
‘뉴스위크’ 편집장을 지낸 국제전문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을 답습하고 있다”며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버드대 석좌교수 스티븐 월트는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두고 “목적도 명확하지 않고, 초청국 선정 기준도 임의적”이라며 “많은 국가를 배제하는 정상회담은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는 미 국무부가 인권 문제를 제기해온 필리핀과 파키스탄이 초청됐다. 민주주의, 인권, 자유 등을 강조한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한국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뉴노멀’ 상황이 곤혹스러운 것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과 미중 사이의 선택이라는 압박이 동시에 가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추진 중이다. 이는 남북뿐만 아니라 미중 양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선택의 딜레마를 낳는다.
당장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부터 문제다. 미국은 지난 12월 6일 중국의 인권문제 등을 이유로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했다. 선수단은 보내되 정부나 정치권 인사로 구성된 사절단은 파견하지 않는 외교적 방식의 보이콧이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은 “동맹국에도 이 결정을 알렸고, 그들 각자가 결정하도록 맡겨둘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의 보이콧이 ‘인권’을 이유로 결정된 만큼 동맹국들은 단순히 올림픽 참가가 아닌 미국에 동의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 중심의 정보동맹 ‘파이브 아이즈’에 속한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 등이 속속 보이콧을 선언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중이 모여 종전선언을 논의한다는 기대가 어긋나게 됐다. 그럼에도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종전선언에 대한 중국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평가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월 13일 한국-호주 정상회담 직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공동성명에 “인도·태평양의 안정이 ‘남중국해’를 포함한 해양 영역에서의 국제법 준수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문구를 포함시켰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국제법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촉발된 국제질서의 변화는 미중경쟁 속 선택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밀착한 한국이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도 더욱 잦아질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선택 한 번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