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불속행 판결문엔 왜 이유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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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은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에 해당해 이유가 없다고 인정되므로 같은 법 제5조에 입각해 상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문장은 길지만, 속뜻은 짧다. 대법원이 당신의 재판을 더 진행하지 않고 사건을 끝내겠다는 뜻이다. 이른바 ‘심리불속행’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해 대법원에 상고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문구가 적힌 서류를 우편으로 받고, 비로소 자신의 재판이 끝났음을 알게 됐다. 2019년 대법원이 종결 처리한 민사·가사·행정소송 사건 1만6990건 가운데 1만2258건(72.1%)이 이런 방식으로 처리됐다.

심리불속행 제도는 대법원이 추가적인 심리 없이 상고기각을 하는 제도다. 상고가 제기된 지 4개월 이내여야 하고, 당사자가 주장하는 상고이유에 ‘원심판결이 헌법이나 법률, 대법원 판례를 위반했거나 중대한 법령 위반이라는 점’ 등이 담기지 않았어야 한다. 때문에 상고심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은 4개월을 앞두고 피가 마른다. 심리불속행을 피해야 의뢰인에게 최소한의 면이 서기 때문이다.

문제는 심리불속행 판결문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단 점이다.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상, 심리불속행 사건은 대법원이 아무런 기각 이유를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민사소송법상 판결의 ‘이유’는 판결문에 반드시 적어야 하는 사항 가운데 하나지만, 사건의 빠른 종결을 위해 특례법상 이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재판 당사자로서는 대법원이 자신의 상고를 기각한 구체적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게 재판이냐”는 볼멘소리만 내뱉게 된다. ‘깜깜이 판결’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배경이다.

심리불속행 제도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대법원 판단을 받아보지 못한 국민은 자신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행법상 ‘재판소원’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심리불속행 사건은 판결문에 아무런 상고기각 사유를 적지 않아 재심이 허용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즉 사건 당사자가 불복할 아무런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불속행 판결에 이유를 기재하지 않도록 허용하는 해당 조항을 두고 헌법소원이 계속해서 제기된 이유다.

입법부 국회의원은 의안 발의의 이유를 밝혀야 하고(국회법), 행정부도 처분하는 행정청이 근거와 이유를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행정절차법). 사법부만 국민에게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없다. 판결에 대한 법원 안팎의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사법 권력 행사에 대한 통제를 회피하는 수단이라는 오해만 부를 뿐이다. 이는 오롯이 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돌아온다.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 회복과 국민의 실질적 권리구제를 위해 심리불속행 사건 역시 다른 판결들과 마찬가지로 ▲심리불속행 재판에 이르게 된 이유 ▲당사자의 주장 등에 대한 판단을 표시할 필요가 있다. 제도를 운용하는 대법원 역시 2010년 상고제도 개편을 전제로 ‘법원이 상고심 불송부결정을 할 경우 당사자에게 그 이유를 밝히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개정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모두가 문제를 인정하는 제도가 최종적인 입법 결정의 부재로,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방치되고 있다. 조속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

<백인성 변호사(KBS 법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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