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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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선생님의 매질,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Sul mare luccica
L'astro d'argento
Placida e' l'onda
Prospero e'il vento

Sul mare luccica
L'astro d'argento
Placida e'l'onda
Prospero e'il vento

Venite all'agile
Barchetta mia
Santa Lucia
Santa Lucia…

[내 인생의 노래]‘산타루치아’

중학교 때 음악 시간은 한마디로 공포였다. 실기에서 음정 하나 삐끗하거나, 장조를 단조로 바꾸는 따위의 질문에 즉답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가는 여지없이 매타작이 작렬하곤 했다. 류 아무개 음악선생은 깡마른데다 생김새마저 흉악하기 그지없었는데, 몽둥이질은 기본에 주먹과 발길질이 예사였다. 음악(音樂) 시간이 아니라 차라리 음악(陰惡) 시간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고통을 견딘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그 음악 시간에 배웠던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려…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와 “카로 미오 밴 크레디욜 맨 센자디테…”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곤 한다. 교실 가득 울려 퍼지던 그 아름다운 선율의 이탈리아 가곡은 이렇게 내 인생의 기억창고에 어둡게 저장되었다.

1990년대 초. 나이 서른 즈음에 난생처음으로 유럽에 갈 기회가 생겼다. 하이델베르크 시내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이탈리아 여행객과 자리를 함께하게 됐다. 서로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나, 너희 가곡 좀 부를 줄 안다”고 객기를 부린 게 화근이었다. “오! 정말? 내가 피아노를 칠 테니 불러봐.” 말릴 새도 없이 그는 카페 안에 있던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물론 카페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대한민국의 명예를 걸고 힘차게 노래를 불러 젖혔다. 절로 사명감이 막 돋았다. 먼저 ‘산타루치아’를 불렀다. 이곳저곳에서 박수와 휘파람 소리, 원더풀,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카페 창밖으로까지 사람들이 운집했다. 다시 ‘카로 미오 밴’을 불렀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불렀는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카페의 주인은 엄지 척과 함께 우리 일행에게 맥주 한 병씩을 무료로 제공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류 아무개 음악선생은 나에게 고마운 분이 아니었을까. 그 가혹한 매질이 아니었으면 교양 없는 인생에 감히 이탈리아 가곡을 흥얼거릴 수나 있었을까. 유럽에서의 그 아찔한 추억은 내게 있을 법한 일이기나 했을까.

얼마 전 보았던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4등>은 이젠 잊은 줄로만 알았던 예의 그 류 아무개 음악선생을 다시금 소환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데 배경음악이 예의 그 “카로 미오 밴…”이 아닌가. 영화는 다시 내게 묻는다. 류 아무개 음악선생은 나에게 고마운 분이 아니었을까. 그 매질이 아니었으면 교양 없는 인생에 감히 이탈리아 가곡씩이나 흥얼거릴 수 있었을까. 그 음악선생은 지금도 내 귓속에다 속삭인다. “네가 미워서 때리는 거 아니거든, 다 너 잘되라고,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 우리는 이제껏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중팔구 약할 때 피해자였고, 힘 있을 때 가해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려면, 피해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어쨌든 먼저 ‘갑’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처럼 외며 스스로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류 아무개 음악선생의 매질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삶의 비극으로 작용했을까, 아니면 삶의 지혜로 자리 잡았을까. 오늘도 창공에 별은 빛나고 우리네 삶은 험한 파도를 넘어 인생의 바다로 나아간다. 산타루치아.

<김형완(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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