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의 영혼이 평화를 찾기 바라며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왔는지
눈물이 말해준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점점 멀어져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긴 시간이 지나도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내 인생의 노래]인순이 ‘아버지’](https://img.khan.co.kr/newsmaker/1394/1394_70.jpg)
6861. 이름보다 더 이름처럼 각인된 번호.
그의 존재는 ‘부재’였다. 존재는 했으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금기의 존재였다. 필자에게 그는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 보일 수 없었던 그런 존재였다. 어린 필자가 그런 존재를 처음 각인한 것은 농번기 어느 토요일 오후 대청마루에서였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마주친 ‘가눌 수 없는 몸뚱이’가 그 실체였다. 불쌍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날갯죽지(겨드랑이)에 작은 손을 넣고 안아보았다.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그는 내 아버지였다. 내 아버지의 고등학교 은사는 ‘참한 학생’으로 기억했고, 병무청의 ‘장정명부 및 병적기록표’에는 탐정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병이었고, 상이군경으로 국가보훈대상자였다. 국가와 법원은 그에게 ‘금치산자(禁治産者)’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어린 필자에게 그의 존재는 공포와 터부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들’이란 호명. 그의 삶은 정신질환자로, 지체장애인으로, 시각장애인으로 50년을 살다 갔다. 그가 청춘으로 살았던 25년, 상이군경과 금치산자로 살았던 25년의 삶은 필자에게는 부채였다. 그의 머릿속에 남아 꺼내보지도 못했던 폭탄 파편 세 조각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필자는 성경에서 예수가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기적을 접한 후 7년을 새벽 5시에 일어나 교회에 가 기도했다. “단 한 번만 저 불쌍한 영혼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면, 내 모든 걸 바치겠노라.” 안타깝게도 어린 영혼의 부름에 대답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국가의 기록은 그가 25년간 고통받은 원인을 ‘동정맥기형. 후대와 동맥 최저 정맥 불합’이라고 기록했다. 뇌동정맥기형은 의학적으로는 선천적 뇌질환으로 아직도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2020년에도 뇌동정맥기형 수술은 “뇌혈관 질환 중 치료가 가장 까다로운 질환”이라고 평가한다. 1967년에는 진단도, 치료도 불가능했다. 육군병원 병상일지에 따르면, 필자의 부친은 복무 중 원인불명의 선천성 뇌질환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1967년 8월 28일 군 병원에 입원해 대대적인 수술을 수차례 받은 후 1968년 5월 31일 의병 제대했다. 장정명부 및 병적기록표에 남은 조작된 흔적과 이상한 기록철 그리고 40쪽이 넘는 병상일지. 병상일지에 남은 최초 진단을 한 군의관과 최종 진단을 한 군의관의 동일한 필적 등 의혹의 조각들은 산재해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설치됐던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던 것도 부친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았지만, 책상 서랍 한 귀퉁이에 숨겨 놓은 풀지 못한 숙제가 되었다. 주위에서 뒤늦게 진실을 밝힌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국가유공자라는 감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만류했다. 다시 그를 어둠 속으로 밀쳐야 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병1-117-6861’. 현재 필자의 부친이 거주하는 한 평도 되지 않는 곳의 주소다. 그의 영혼이 평화를 찾기를 바라며, 가끔 들러 소주 한잔과 함께 인순이의 ‘아버지’를 읊조린다. 어린 시절,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와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영면하시라!
<박신용철 더체인지플랜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