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기 위한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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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다섯 살인 내 딸의 꿈은 소방관이다. 두 살 때부터의 꿈이었다. 소방관이 멋지게 나오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많이 봐서인 것 같다. <바다탐험대 옥토넛> 같은 만화도 좋아해 ‘구조’와 ‘모험’이라는 단어에 흥이 난다. 그런 딸이 요즘 조금씩 ‘공주’와 ‘왕자’의 존재를 인식해가고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에는 공주와 왕자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딸은 <겨울왕국>을 보고 담요를 둘러 드레스를 만들더니 <슈퍼 마리오> 게임 시리즈에 빠지고서는 ‘피치 공주’ 옷을 사달라고 졸랐다.

젠 왕 작가의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한국어판 표지

젠 왕 작가의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한국어판 표지

피치 공주는 금발에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버섯왕국의 공주다. 붙잡혀 구출을 기다리는 게 주된 역할이다. 딸이 “피치 공주를 구해야 해!”라고 외칠 때마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다. 성별 규범의 세계에 포획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는 내가 아니다. 금지란 무력하고 무용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낫다. 그러나 편향된 텍스트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다른 삶과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걸, 아이와 함께하며 더욱 절감한다. 올해 부천만화대상 해외작품상을 수상한 <왕자와 드레스메이커>(젠 왕 지음·김지은 옮김·비룡소)는 그런 면에서 반가운 작품이다. 아이와 나눌 이야기의 폭을 확장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왕자가 무도회를 연대!”

이 작품은 동화책에서 수도 없이 들어 익숙한 말로 문을 연다. 벨기에 왕자 세바스찬은 여름 동안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무도회는 그의 열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귀족의 딸들로 의상실이 넘쳐난다. 누구보다 돋보일 드레스가 필요하다. 왕자의 간택을 받으려면. 무도회 따윈 관심 없지만, 엄마의 성화에 떠밀린 소피아 로한은 재봉사에게 ‘악마의 새끼’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주문을 한다. 그 주문을 곧이곧대로 들은 프랜시스는 깃털과 망사로 된 파격적인 검은 드레스를 만들어준다. 귀족들을 경악시킨 소피아가 무도회를 휩쓴 건 당연지사(?). 그리고 왕자는 간택한다. 소피아 로한의 ‘드레스’를.

세바스찬 왕자에게는 비밀이 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갖춰 입고 ‘레이디 크리스탈리아’가 되는 것. 그의 취향에 꼭 맞는 드레스를 만드는 능력이 재봉사 프랜시스에게 있었다. 의상실의 말단 재봉사지만 프랜시스의 꿈은 ‘위대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왕자의 전속 재봉사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작가 젠 왕은 ‘왕자와 신데렐라’ 식의 이야기를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자아를 찾기 위해 나아가려는 두 사람의 성장기로 변주한다.

프랜시스의 옷을 입은 ‘레이디 크리스탈리아’는 패션의 도시 파리의 가장 인기 있는 패션 아이콘이 된다. 둘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아니, 얻지 못했다. 그들이 이룬 성취를 세상에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고자 했지만, 나를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이 두 사람을 뒤흔든다. 세바스찬과 프랜시스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가. 선택은 어떤 조건 속에서 가능해지는가. 세바스찬과 프랜시스는 서로의 한계와 위기를 일깨워주며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둘에게 용기를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외롭지 않을 때, 삶은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수 있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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