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밤, 서울 관악구에 살던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지난 8월 11일에는 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사람들이 밝힌 촛불 하나하나 모두 무겁고 비통했다. 고인 중 1명은 일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부루벨코리아지부 간부였다. 추모사를 읽던 동료는 “직장에서 천사라 불렸는데, 정말로 천사가 돼버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언론은 고인에게 비슷한 이름표를 붙였다. 도시빈곤층, 취약계층… 동료들의 말은 달랐다. 명랑하고 밝은 사람, 남을 돕는 사람, 가족과 행복했던 사람. 주거지가 반지하 공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호도된 이미지와 치열하게 분투하는 언어였다.
사고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는 놀라웠다. 119에 여러차례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제때 구조되지 못한 이들의 사고현장을 목전에 두고 대통령은 왜 미리 대피하지 못했는지 물었다. 오세훈 시장은 한술 더 떠 앞으로 서울에서 반지하주택을 없애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오 시장은 반지하가 “후진적 주거유형”이라며 “사라져야” 하는 공간이라고 언급했다.
반지하가 그렇게 나쁜가? 카카오웹툰에서 연재하는 생활툰 <반지하셋방>은 제목 그대로 ‘반지하 셋방’에서 두 자매가 함께 생활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자의 반 타의 반 독립하게 된 자매는 가용 예산에 부합하면서 개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알아보다가(1화) 반지하 셋방에 입주한다. 자매의 시각에서 반지하는 ‘궁전 같은’(3화) 곳이다. 수압이 셀 뿐 아니라 겨울에 추위를 막아주고 여름엔 덜 뜨거워 냉난방비가 절약되기 때문이다.
반지하가 객관적으로 좋은 주거형태인 건 아니다. <반지하셋방>의 자매들도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창문을 제대로 열 수 없는 환경에 때로 곤란해한다. 그러나 이 공간만으로 자매들의 삶을 설명할 순 없다. 자매는 유기견이 될 뻔한 개를 도맡아 돌보고, 부당한 노동환경에 적극적으로 항의하며 가족과 다정한 일상을 나눈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이들 자매의 명랑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작품 바깥까지 솔솔 퍼져나온다.
삶이 주거형태 하나로 결정되지 않듯, 죽음도 그렇다. 비상상황에 마비됐던 구조체계, 제때 닿지 못한 재난 대피안내, 탈출할 수 없던 건축 구조… 모든 것이 사인(死因)이었다. 이 사고는 반지하에 들이닥친 자연재해가 아니라 폭우에 대응하지 못한 정부의 인재다. 이런 상황 속에 서울시는 오로지 반지하만을 문제로 지목한다. 반지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왜 그곳에 입주했는지 한톨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반지하만 없어지면 사람들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반지하셋방>의 ‘현정’은 작중에서 반지하보다 그 이전에 살던 집들이 더 불편했다고 말한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거나 비가 오면 수시로 전기가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반지하가 아니어도 위험한 집은 많다. 반지하를 섣불리 들어내고 나면, 선택지가 사라진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반지하를 삭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이 정책은 도리어 이 사건으로부터 정부의 책임을 무화(無化)한다.
실제로 아직 고인들의 죽음 앞에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든 해결의 첫걸음은 책임자가 책임을 인식하는 것부터다.
<조경숙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