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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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들어왔다. 퇴원을 앞두고 육아용품을 주문하려고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갔다. 다음날 배송해주는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로그인조차 쉽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자 공포를 느꼈다. 내가 그동안 온라인 쇼핑, 택배기사님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비교적 (아직은) 안전한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밖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큰 공포를 매일매일 겪고 있을 것이다.

2월 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 인권이 없는 차별적인 코로나 대응, 국가인권위원회 긴급구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연합뉴스

2월 2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 인권이 없는 차별적인 코로나 대응, 국가인권위원회 긴급구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연합뉴스

특히 청도대남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정신병동에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사람들은 대규모로 질병에 걸리고 죽어서야 그 존재가 확인됐다. 격리되어 있었고, 적절한 돌봄을 받지도 못해 약해진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속수무책으로 감염되고 죽어가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교사 유기훈님의 “단절된 폐쇄병동에서 집단발병된 사실이 너무나 다행이면서 동시에 절망적”이라는 지적이 뼈아프게 와 닿았다. 전국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다수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탈시설 정책은 우리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6개월 전 나는 첫 칼럼에서 앞으로 법과 관련된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그동안 외롭게 ‘그들만의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19로 더욱 삭막해진 우리 사회를 보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코로나19의 광풍이 휩쓰는 지금 이 시기에 광장에 모여 집회를 하거나 같이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닌 이상 혼자서는 살아갈 재주가 없다. 그런데 농경시대를 살던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욱 혼자라고 느낀다. 혼밥·혼술이 트렌드이고, 이웃에 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 지낸다.

김도형님은 최근 펴낸 <장애학의 도전>에서 “분업화된 오늘날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더 의존하지만 근대인은 고독하다”고 했다. 오죽하면 영국에는 외로움 담당 장관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는 행복부 장관이 생겼을까. 코로나19는 물리적으로 사람을 단절시키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경계심·적대감·혐오의 감정을 퍼뜨리는 것이 더욱 걱정된다. 우리가 서로 의존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잊은 채 고독·외로움이라는 사회적 질병에 이미 걸린 상태라 몸과 마음의 후유증은 더 오래갈 것 같다.

이 칼럼에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차별금지법이라는 부정적 표현보다는 평등법이나 ‘모든 생명체의 존중과 연립에 관한 법’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6개월간 칼럼을 통해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인연을 소중히·감사히 생각하면서 공익변호사로서의 내 작은 역할에 더욱 충실할 것이다.

법률프리즘 필자 중 한 명인 이주언 변호사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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