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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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도 본질을 파헤친 후지타 쇼오조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 파시즘의 본질을 파헤친 이 사상가는 그와 동시에 줄줄이 행렬을 이뤄 어떤 방향으로 성찰 없이 몰려가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그래서 정치사상의 측면에서나 사회적 행위와 교류에 있어서나 늘 ‘단독자’로 살았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표지.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표지.

30만㎞를 넘게 달린 차를 팔고 새 차를 샀다. 차를 새로 사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고 나서 1년 2개월쯤 걸렸다. 처음 관심 있게 봤던 차는 통 큰 결단을 내릴 쯤에는 구형 차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차를 눈여겨봤고 이번에는 석 달 만에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사소한 usb 메모리나 지갑조차 한 달을 넘길 때도 있으니, 새 차 석 달은 ‘신속한 결단’이다.

그러는 중에 그 물건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와 사용후기를 다 찾아본다. 선풍기 같은 계절상품은 온갖 사용후기를 다 읽고 나서도 결정을 미루는 바람에 한여름이 지나서야 살 때도 있다. 바람직한 ‘인성’은 아니다.

아쉬운 것은 상품 소개나 사용후기가 읽을 만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사게 된 차의 ‘시승기’도 남김없이 읽어봤는데 자동차 회사가 제공한 정보를 줄줄이 나열하고 그 앞뒤로 진부한 표현을 성의 없이 끼얹은 게 대부분이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엔진음’이라는 시승기를 보면, 그 자가 그 차를 실제로 타봤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오디오 잡지를 오랫동안 정독하였는데, 그 안에 실린 시청후기의 첫 문단만 봐도 국내 평론가와 해외 평론가의 스타일이 확연히 구별된다. 국내 평론가들은 그 짧은 시청후기에 서론(회사 연혁 줄줄이 나열), 본론(오디오의 단순정보 나열) 그리고 ‘불을 끄고 들으면 더욱 풍윤한’ 식의 공허한 결론을 십수 년째 반복한다. 반면 외국 평론가는, 특히 일본의 평론가는 ‘아, 이거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는 식으로 첫 문장부터 스파이크를 날리면서 시작한다. 카메라나 영화잡지는 물론이고 정치평론이나 사회사상에서도 날카로운 문장 혹은 득의의 한 단어로 사태의 본질 깊숙이 파고든다.

그 대표자가 후지타 쇼오조오다. 물론 정희진이 “문장은 거대하고 빽빽한 삼림 같다. 깊고 넓은데도 낱낱이 충실하다. 내려놓을 글귀가 한 줄도 없다”고 독후감을 썼다시피, 후지타 쇼오조오의 글이 어떤 독특한 단어나 기묘한 아포리즘의 나열은 아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 파시즘의 본질을 파헤친 이 사상가는 그와 동시에 줄줄이 행렬을 이뤄 어떤 방향으로 성찰 없이 몰려가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그래서 정치사상의 측면에서나 사회적 행위와 교류에 있어서나 늘 ‘단독자’로 살았다.

그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에 실린 ‘현대에서의 이성의 회복’을 이렇게 시작한다. “십수 년 전 거친 들판 한가운데 서서 몇 가지 새로운 ‘결의’를 보여주었던 일본 사회는 어떠한 정신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심오한 질문의 문장을 보면 당연히 그 다음 문장도 읽게 된다. 또한 “양보할 수 없는 대항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에도 그 상황 자체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사태로 간주하는 안목을 버리지 않는다면 전면대립을 거쳤을 때 초래되기 쉬운 경직된 후유증은 생기지 않을 것”(‘오늘의 경험’)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는 그가 이를 악물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은 전후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나침반이다. 그러나 어떤 단독자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절대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지와 파멸의 흩뿌려진 혈흔을 감식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범한 눈빛’과 ‘이론적 박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고독의 영역으로 퇴거’하려는 거장의 거친 숨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오는 이 책의 ‘서문’ 끝에서 후지타 쇼오조오는 이렇게 덧붙인다. “안타깝지만 몸이 최후의 집중력을 잃고 나니, 그 신체적 조건이 얼마나 언어 구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잘 알겠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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