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가 전하는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
“사랑하는 돌고래들아, 친애하는 돌고래들아! 너희는 나름대로 완벽한 존재들이야. 자연은 너희에게 관대한 예외를 허용했어. 그 증거로 너희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여생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쉼보르스카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https://img.khan.co.kr/newsmaker/1312/1313_78.jpg)
책상 위에 ‘읽는 책, 읽을 책, 읽다가 말 책’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다. 시집도 있다. 팔을 뻗으면 바로 닿을 만한 곳에. 시는 문학적 무게와는 별도로 일단 가볍고 얇아서 ‘오늘도 또 한 권 읽었다’는 속물적 욕망의 표적이다. 그러나 조금 무겁게 말한다면, 다른 책들이 수많은 언술과 문장으로 꽉 들어차 있음에 비해 그야말로 텅 빈 종이에 한 획을 긋는 듯한 서늘하고 날카로운 언어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삶의 비밀을 보여준다. 한순간에 일상의 틈을 갈라버린다.
아무렇게나 펼쳐보는 셰이머스 히니 전집의 한 구절 ‘그녀는 커다란 창 그 자체처럼 늘 고정된 상태였다’, 또, 짚이는 대로 펼쳐본 예이츠 전집의 한 구절 ‘감미롭고 수정 같은 소리가 결여된 영혼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시집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다. 벌써 몇 달째, 몇 권의 시집이 앉았다가 일어섰지만, 쉼보르스카의 시집은 늘 자리에 있다. 그래서 또 아무렇게나 펴보는데, 역시 다른 수십 권의 책을 압도하면서 대번에 내 시공간의 무게들을 뒤흔들어 버린다. 그녀는 시 ‘사진첩’에서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신화로 남겨질 만한 일도 없다고. 삶은 얼마나 격렬하고 고통스러운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길고 또한 지루한가. 쉼보르스카는 이렇게 쓴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늘 곁에 두고 읽는 시인인데, 누군가의 소개로 그녀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읽게 되었다. 김현이나 김윤식이 그렇고 이탈로 칼비노나 테리 이글턴이 그렇듯이, 거장들이 쓴 ‘책에 대한 책’은 늘 흥미롭다. 서평의 대상이 된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고 남다르게 해석하는 대가의 문학적 깊이를 다른 문법으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렇다. 우선 제목부터가 ‘시크’하다. ‘읽거나 말거나 나는 내 방식대로 서평을 쓴다’는 태도가 썩 맘에 든다. 그녀의 시선과 문장을 따라가면 언젠가 그 책들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선도 독특하고 문장은 날카롭다.
아예 서문 ‘저자의 말’에서부터 그렇다. 평론가들이 찬사를 보내는 책들은 먼지가 쌓인 채 서가에 꽂혀 있는 반면 “토론이나 추천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문득 나는 이런 책들에 관심을 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쓰면서, 그녀는 “느긋하고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펴면서 서평을 쓴다.
그 행위는 가히 인류사적이다. 다시 서문을 인용하건대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호모 루덴스는 춤추고, 노래하고, 의미 있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포즈를 취하고, 옷을 차려입고, 식도락을 즐기고, 정교한 예식을 거행한다. (중략)…이런 즐거움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상상도 못할 만큼 단조로워질 것이며, 동시에 대부분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찌 쉼보르스카의 서평집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폴란드의 해양생물학자인 듯한 엘지비에타 부라코프스카의 <돌고래의 모든 것>을 서평하면서 쉼보르스카는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돌고래들아! 너희는 나름대로 완벽한 존재들이야. 자연은 너희에게 관대한 예외를 허용했어. 그 증거로 너희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여생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돌고래가 전하는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돌고래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란다. 태평스런 바다의 어린 영혼, 절대 읽지 않을 이 편지의 선량한 수신인이여.”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