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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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번역가 이윤기의 ‘뼈아픈 실책’

그는 이른바 명작이요 걸작이라는 것을 수십 권 번역하였는데, 이 <장미의 이름>에서는 뼈아픈 실책을 하고 말았다. 결국 2000년 철학자 강유원의 첨삭에 따른 2차 개정판, 2009년 일부 오역을 고친 3차 개정판이 나왔다.

버스가 알프스 북부의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휴게소에 멈췄을 때, 나는 A1 고속도로 북쪽으로 펼쳐진 작은 도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명확하게 실내로 구분되는 공간이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유럽의 ‘선진문물’에도 불구하고 사람 없는 곳을 찾아 구석진 곳으로 가서 몰래 피우다시피하는 주눅 든 버릇 덕분에 나는 평화롭게 펼쳐진 작은 도시가 멜크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 표지

<장미의 이름> 표지

멜크는 바로 그 멜크 수도원, 멜크 시를 굽어보는 절벽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은 채 로마 가톨릭의 이념적 근거지로 1000년 가까이 버텨온 수도원이 있는 곳, 그 위세가 먼 발치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물론 멀리서나마 완상하게 된 지금의 멜크 수도원은 바로크 시대의 건축가 야콥 프란타우어의 작품으로 세속 권력의 절대왕정들이 앞다퉈 세운 궁전과도 같은 형세를 갖고 있지만, 내 독서록 속의 멜크 수도원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멜크 수도원 아드소 신부의 회고

바벤베르크 왕가(1076~1106년)가 1106년께 피폐해진 로마 가톨릭을 일신하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회에 왕궁을 기증한 이후 조성된 험준한 산 위의 요새형 멜크 수도원은 지금처럼 세속 권력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규모에다 수많은 회화와 조각 작품들로 바로크식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데, 이는 에코의 소설의 배경, 즉 14세기와는 다소 무관하다. 다만 9만여 권의 진귀한 장서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 주인공인 아드소 신부의 다음과 같은 회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바야흐로 바닥 모를 심연, 고요와 적막의 신성(神性)이 가득한 그 심연을 헤맬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이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싯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리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기면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이 펼쳐진다. 이 사건은 14세기의 늙고 병든 신부 아드소가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양피지에 적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의 아드소가 겪은 일이며, 이를 18세기의 석학으로 불리는 베네딕트회 장 마비용 수도사가 편집하여 1842년 파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가 펴냈다. 이를 움베르토 에코로 유추되는 저자 ‘나’가 1968년 8월 16일에 손에 넣게 되는데, ‘나’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대학노트 몇 권에다 번역하였으나, 잘츠부르크 인근 몬트제 호숫가의 호텔에서 분실하게 되고….

이렇게 간략히 요약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서지학적인 이야기가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온다. 아드소는 실존 인물인지, 그의 기록은 ‘사실’인지, 라 수르스 수도원에 출판부는 존재하였는지, 이러한 질문들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아 ‘나’는 라 수르스 수도원은 물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이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서점까지 뒤지게 된다.

<장미의 이름>을 읽는 데 있어 이런 서지학적인 탐사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텍스트와 기호들이 지시하는 지적인 방향들, 그 방향들 속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기록과 신학적 담론들, 그를 둘러싼 ‘중세 중의 중세’, 즉 1327년 11월 말의 7일 동안 프랑스 접경 아페니노 산맥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사건 속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본격적인 사건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병들고 지친 몸으로 양피지에 한 글자씩 적고 있는 아드소 신부의 기록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문’, ‘노트’, ‘프롤로그’를 앞에 달고 있다. 이 세 장치는 ‘소설’이긴 해도 함부로 배척하기 어려운 서지학적인 자료를 ‘제공’하여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이 실제로 역사적 지층 아래에 숨겨져 있는 충격적이고도 ‘무서운’ 사건임을 다각도로 암시한다. 그런 후에 소설, 아니 아드소 신부의 기록 ‘제1일’이 시작한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러고는 놀라고 말았다.”

나를 포함하여 한국의 독자에게 이 소설은 에코의 작품이자, 강유원의 꼼꼼한 주석이 첨가된 이윤기의 작품이다. 2010년 8월 27일, 63세로 타계한 이윤기는 뛰어난 신화 연구자이며 소설가였고 무엇보다 탁월한 번역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번역을 따라 고전 그리스에서 현대 유럽 문학 사이를 걸어다녔다.

움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

강유원의 주석이 첨가된 이윤기의 작품

이윤기는 일산 고봉산에서 관측병으로 근무하다가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게 되어 그곳에서 12개월을 보냈다. 무공훈장까지 탄 전투 사병이었다. 그러나 전우를 정글에 묻고 베트남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내 괴로운 일이었다. 1975년 현충일에 이윤기는 전투 중에 받은 여러 개의 훈장을 핏자국이 남은 군복에 줄줄이 달아 국립현충원의 전우 묘지 앞에 놓아두고 돌아섰다. 베트남 이후 30여년 동안 악성 피부 습진에 시달렸다.

아무튼 그는 이른바 명작이요 걸작이라는 것을 수십 권 번역하였는데, 이 <장미의 이름>에서는 뼈아픈 실책을 하고 말았다. 1986년, 이 소설은 이동진 번역의 우신사 본과 이윤기 번역의 열린책들 번역으로 출간되었다가 곧 우신사 본은 절판되고 열린책들 본이 살아남았다. 그 후 세 번이나 개정판이 나왔다. 1992년, 이 소설과 관련된 책들을 대거 참조하여 500개에 달하는 각주를 포함시킨 1차 개정판, 2000년 철학자 강유원의 첨삭에 따른 2차 개정판, 2009년 일부 오역을 고친 3차 개정판이 나왔다.

이윤기에 따르면 번역이란 말의 무게를 다는 ‘천칭’과도 같아서 한 쪽에 원문을 올려놓고 반대 쪽에 그에 합당한 우리말을 찾아 올려놓아 그 무게를 재봐야 한다. 대체로 이윤기의 천칭은 균형이 맞았고 특히나 그 문장의 유려함과 단어의 다채로운 활용은 귀감이 되었으나 <장미의 이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급히 서두른 감도 있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개념과 단어와 인명을 소홀히 다뤘다. 2000년 철학자 강유원이 따로 원서를 꼼꼼히 읽고, 그 실수와 오류를 일일이 적어 번역자와 출판사에 보냈고 이를 과감히 인정하고 수용함은 물론 그 과정을 개정판 번역본 말미에 일일이 적은 것은 내 생각에, 거장 이윤기의 과감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 한 대목을 읽어보자. “강 박사께 한없이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또 오금 저리는 세월을 오래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강 박사같이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 주고 있는 것은 우리 번역계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에 강유원 박사가 답례를 했으니 이 또한 이 소설의 말미에 다 수록되어 있다. “이윤기 님과 열린책들은 책을 새로이 펴내면서 우리의 작은 노력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무책임한 번역과 어지러운 출간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는 은밀한 기쁨으로 간직될 것이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의 ‘서문’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4세기의 독일 신학자 아켐피스의 경구로 마무리하고 있거니와 이윤기와 강유원의 지적 교류야말로 중세 신학자의 경구에 어울리는 풍경이니, 마저 소개한다.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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