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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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노회찬

늘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하는데, 아차 그만 얼떨결에 음험한 자들의 몰윤리에 발목이 잡혀, 저항도 하고 부정도 하고 끝내 괴로워하다가 그 반대편으로, 노회찬 의원은 진실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생을 마감했다.

소설가 이청준에게 평생 드리워진 문학적 트라우마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6·25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사람들이 전짓불을 들이대며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끔찍했던 유년기의 기억이며, 다른 하나는 지독히도 가난했기에 그것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또한 그것이 문학의 길이었고 고향일 수밖에 없었던 배고픔의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소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소설

“너는 어느 편이냐?”며 갑작스레 들이닥쳐 묻는 질문은 전쟁기의 잔상으로 끝나지 않고 훗날의 독재시대에나 그 밖의 사소한 일상에서도 그 세대 지식인들에게 자주 변용되었거니와 가난의 기억 또한 ‘먹고살 만한’ 형편이 된 후에도 늘 그 연배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채는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당신은 그런 적 없는가. 목이 부러질 정도로 낡은 선풍기를 고집스레 쓰는 부모에게 화를 낸 기억 말이다. “까짓 선풍기 하나가 얼마 한다고 이러세요.” 그게 금세 밑도 끝도 없는 말씨름이 되고 뜨거운 여름밤의 신경질로 확대된다.

앞의 기억은 이청준에게 ‘이념과 그 선택’의 화두가 되었고, 뒤의 기억은 이청준에게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희롱감이 되거나 심지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을 일은 결코 아니라는 의식이 굳어졌다.

그 확실한 문학적 근거가 이청준의 ‘참기름’ 이야기다.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논문에 의하면 이 ‘참기름’ 이야기가 의외로 간단치 않다. 가난한 대학생 이청준이 친구네 집에 갔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참기름 한 병을 들이마시고 고생을 했다는 얘긴데, 이청준은 이를 두 번 세 번 부정한 바 있다. 이 이야기를 술자리 같은 데서 확대 재생산하고 심지어 이청준의 소설을 분석하는 키워드로까지 활용한 사람은 뜻밖에도 그와 ‘지음(知音)’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문학평론가 김현이었다.

이청준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은 “서너 해 연상의 내 나이 차를 무시하고 첫 부름부터 대뜸 ‘청준아, 이 이가 촌놈아!’ 식으로” 부르면서 “늘 거침없는 농조로 나를 놀리고 골려대길 좋아” 했는데 심지어 “내 소설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런 식 거친 농투를 일삼았다”고 씁쓸히 회고한다. 그가 1999년에 쓴 ‘이 나이의 빚꾸러미’를 보면, 김현이 “때나 장소 가림없이 여러 사람 앞에-여러 사람 앞에선 단골 제물감으로 더욱!-갑자기 나를 지목해 그렇듯 우스갯거리를 삼는” 일이 잦았는데 “참기름 한 병을 다 들이마시고 큰 고생을 했다더라”는 얘기도 실은 김현의 “짓궂은 우스개투 상상의 산물”이라고 이청준은 기록한다.

이청준은 과연 참기름 한 병을 마셨나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92년에 발표한 글 ‘미백의 사상 또는 이청준의 글쓰기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이 참기름 건을 언급하면서, 평론가 김현이 소설가 이청준과의 ‘승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작품 바깥의 에피소드, 그것도 확인이 불가능한 데다 본인이 극구 부인하는 일화를 분석에 도입한 것은 ‘규칙 위반’이라고 쓰기도 했다.

아무튼 ‘참기름’과 관련된 세 거장의 글과 관계를 분석하면서 서영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거쳐오며 처참한 가난 속에서 성장해온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자긍심의 훼손이다. 궁핍도,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자긍심을 잃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썼다.

이광수를 출발점으로 하여 최인훈, 이청준, 임철우를 거쳐 신경숙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이 한반도의 복잡한 마음의 풍경과 그 연대기를 해부한 서영채의 논문집 제목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다. 이 두 단어로 그 엄청난 문학사의 기록들을 낱낱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해부의 나침반으로는 충분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 마음에, 다름아닌 독자들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부정하고 싶어도 늘 웅크리고 있는 감정 상태가 바로 ‘죄의식’과 ‘부끄러움’ 아닌가. 그 주체와 대상이 가족이든 사회든 상관없이 말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편혜영 장편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 편혜영 장편소설

앞서 언급한 ‘참기름’과 관련된 서영채의 논문 제목은 ‘과잉윤리와 몰윤리 사이의 문학’이다. 과잉윤리와 몰윤리! 지나친 부끄러움과 뻔뻔하고도 염치없는 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투명한 상태로 반추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윤리적인 삶 말이다.

그렇기에 이청준의 ‘참기름’은 지금도 의미 있게 변용되는 괴로운 세계다. 최근작으로 보면 편혜영의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이 생각난다. 편혜영은 우리가 추악하고 괴로운 상태를 가리기 위해 얼기설기 기워놓은 일상의 재봉선을 확 뜯어서 아예 시커먼 밑바닥까지 보여주곤 했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의외로 작가 스스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재봉을 하고 있다. 또한 이기호의 소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도 과감히 일독을 권한다. 우선 KTX 속도로 읽힌다. 독특한 유머감각의 이기호 아닌가. 그러나 어느덧 속도감을 잃고 만다. 키득키득거리면서 읽다가 어느 순간 우리 일상의 살얼음이 쫘악 갈라지는 걸 보게 된다.

몰윤리가 지배하는 정치판 낡은 시스템

특히 중요한 것은 맨 뒤에 실린 ‘이기호의 말’이다. 소설집 출간이 계획보다 늦어지게 된 연유를 쓰면서, 이기호는 실제로 본인이 겪은 교통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이야기냐고? 그것까지 얘기하긴 그렇고, 한마디로 ‘과잉윤리와 몰윤리’, 곧 오늘 우리가 줄곧 나눈 뒤엉킨 모순이라서 괴로운 이야기다. 이기호는 쓴다.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누군들 그렇지 아니한가. 온갖 욕망이 뒤엉킨 혼탁한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는 우리 같은 일상인의 처지에서 과잉윤리와 몰윤리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 간격의 균형을 맞추려고 우리는 이를 악물고 결백을 주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세한 해명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구차한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다. 그렇게 또 하루의 일상이 후텁지근하게 넘어간다.

그런데 정치인이라면, 더욱이 ‘가치’ 정치를 지향하고 스스로 실천했던 정치인이라면 그 거리는 결코 좁히거나 뒤섞을 수 없는 결연한 상태가 된다. 정치 세계에서 과잉윤리와 몰윤리는 매우 가깝기도 하고 더러는 뒤섞여 있어서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서 늘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하는데, 아차 그만 얼떨결에 음험한 자들의 몰윤리에 발목이 잡혀 저항도 하고 부정도 하고 끝내 괴로워하다가 그 반대편으로, 노회찬 의원은 진실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생을 마감했다.

몰윤리가 지배하는 현실정치의 낡은 시스템과 추악한 관계들 틈바구니에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로 오랜 노동운동과 의정활동 과정에서 진실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몸소 실천했던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애통하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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