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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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루카쿠는 왜 인종차별에 시달렸나

제국의 식민지 시대, 벨기에는 콩고에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다. 1884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콩고를 장악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상아 무역과 고무 채취의 거점인 콩고를 폭정, 고문, 학살로 붉게 물들였다.

벨기에로 돌아간 루카쿠는 어떻게 되었을까? 8강전에서 브라질을 꺾은 벨기에. 그 정교한 패스워크와 촘촘한 조직력의 핵심에 로멜루 루카쿠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역부족이었다. 4강전에서 루카쿠는 프랑스의 콘크리트 수비벽에 막혀버렸다.

유소년 때부터 뛰어난 기량으로 각종 프로팀과 대표팀에서 타점 높은 공격수로 활약한 루카쿠는 10대 후반에 벨기에 리그를 평정한 후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첼시, 에버턴을 거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다.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그러는 과정에서 루카쿠는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가난과 차별 속에서 루카쿠는 공을 찼다. 12살 때 소년 루카쿠는 유소년리그에서 34경기 76골을 넣고는 외할아버지에게 자랑하려고 전화를 했다. 외할아버지는 울먹이면서 “내 딸은 잘 있니? 잘 지켜 줄 수 있지?”라고 말했고, 닷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외할아버지와 한 번만 더 통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 딸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이제 집에 쥐도 없고, 바닥에서 주무시지도 않아요. 이제 더는 사람들이 내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들은 내가 누군지 잘 알거든요’라고 말이다.”

그렇게 스타로 등극했음에도 벨기에의 일부 극악한 인종주의자들은 루카쿠가 대표팀 경기에서 실수라도 하면 비난을 퍼부었다.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루카쿠는 파나마를 완파했다. 두 골이나 넣었다. 경기 후 BBC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벨기에 언론은 내가 좋은 경기를 하면 ‘벨기에의 공격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진한 날에는 ‘콩고의 피가 흐르는 선수’로 바뀌어 있다”고 하면서 “나를 키운 건 분노”라고 말했다. 그런 인터뷰까지 했으니, 벨기에를 4강까지 견인한 루카쿠를 자국 팬들이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콩고의 피’라는 대목이다. 루카쿠는 콩고민주공화국 이민자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로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국가대표 공격수였다. 하지만 벨기에로 이주한 다음에는 선수로서 제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파산했다. 그러는 중에 루카쿠는 벨기에 제2도시인 앤트워프에서 태어났다. ‘콩고의 피가 흐르는 선수’라는 것에는 이런 이민의 역사가 묻어 있다.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로 전락한 콩고

그러나 그 이상이다. 제국의 식민지 시대, 벨기에는 콩고에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다. 1884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콩고를 장악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상아 무역과 고무 채취의 거점인 콩고를 폭정, 고문, 학살로 붉게 물들였다. 콩고는 레오폴드 2세가 제멋대로 해도 되는 거대한 사유지로 전락했다.

결국 벨기에 정부는 1908년에 콩고의 통치권을 개인 레오폴드 2세에서 정부 관할로 옮겼지만, 그 이후로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민시대와 그 이후의 파행 속에서 콩고는 무려 130년 이상 내전이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 10년 동안에도 무려 600만명 가까이 희생됐다. 벨기에 정부는 2002년, 콩고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친소련 성향의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의 피살을 묵인한 데 대한 최소한의 제한적인 사과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이고도 책임 있는 사과는 아직 없다.

그러니까 ‘콩고의 피가 흐르는 선수’라는 표현은 단지 콩고에서 이민해 왔다는 거주 이전의 표현이 아니라, 여전히 벨기에의 일부 극악한 사람들이 야만적인 인종차별의 패악한 감정을 갖고 루카쿠 선수를 비난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에서 생각나는 소설은 역시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이다. 원제가 <Heart of Darkness>라서 <암흑의 핵심>으로 번역한 책도 있다. 1857년 12월 3일 폴란드에서 태어나 1924년 8월 3일에 사망한 조지프 콘래드의 대표작이다. 콘래드는 17살부터 선원으로 일하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32살 때는 콩고강을 항해했다.이 항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1899년에 <어둠의 심연>을 발표했다.

벨기에 상아 무역회사의 아프리카 주재원 커츠, 그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 지휘자였으나 소식이 끊겨버렸다. 그를 작품 속 화자인 말로우가 콩고강 상류까지 찾아나선다. 그 과정에서 말로우는 온갖 형태의 만행과 악덕과 참상을 목도한다. 다름 아닌 유럽 백인들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들이었다. 말로우는 밀림(어둠) 깊숙이 들어간다. 그곳은 아프리카라는 검은 땅의 핵심이지만, 오히려 작품 전체로 볼 때는 서구 제국주의라는 암흑의 한복판이며, 이를 상징하는 커츠가 ‘공포! 공포!’라고 저주하며, 그 자신을 포함한 서구사회의 조종을 울리는 듯한, 그런 핵심이 된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콩고의 피가 흐르는 선수’ 루카쿠

콘래드는 <로드 짐> <서구인의 눈으로> <노스트로모> 등에서 사진의 다중노출이나 엇갈린 프레임처럼 파격적인 현대적 실험을 통해 인간(아, 물론 근대의 서구인)이 처한 불안의 본질을 그리고자 했다. 영문학자 진영종은 <노스트로모>가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데, 1980년대 중반에 한길사가 출간한 옛 번역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2011년의 누벤출판사 판은 일찌감치 품절이다. 그래서 못 읽었다. 대신 <로드 짐>에 집중하였는데, 깊은 어둠 속에서 다중 교차 시점으로 주인공의 심리적 지형을 헤아리는 데 나는 실패했다.

로멜루 루카쿠

로멜루 루카쿠

그에 비하면 <어둠의 심연>은 약간 두툼한 중편의 두께에, 전체를 관류하는 대화체 문장, 그리고 서두에 묘사되는 템즈강에 대한 묵시록적 풍경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 초점이 뚜렷하다.

호미 바바는 <문화의 위치>에서 왜 백인 주인공은 ‘공포, 공포’라는 커츠의 마지막 진술을 그의 애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는가를 붙들고 씨름한 끝에, 이러한 언술 행위가 ‘제국의 말을 동요시키고, 제국은 이것을 다시 그럴 듯한 거짓말로 바꾸며, 이렇게 제국과 피식민의 관계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양가적이고 분열적인 관계’라고 분석한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는 아예 소설 초반부, 콩고강으로 스며드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흑인에 대한 콘래드의 묘사 역시 극단적인 인종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런 까닭에 영문학자 이미애에 따르면 콘래드의 작가적 삶은 “인간의 내밀한 동기나 삶의 실상이 불가해한 것이라는 그의 회의주의적 인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의 불투명성에 대한 인식으로 인하여 지난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어떤 정답을 또박또박 옮겨 적은 진부한 소설보다는 자기 세계의 한계 안에서 ‘지난한 고통의 연속’을 견뎌낸 콘래드의 자술서들이 문학적으로는 더 값지다. 국내판 <어둠의 심연>에는 이 중편과는 무관한 짤막한 ‘작가노트’와 ‘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넓은 시야로 보면 <어둠의 심연>과 무관치 않다.

그 ‘작가노트’에서 콘래드는 <어둠의 심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길한 반향을, 자신만의 톤을, 희망컨대 마지막 음조가 울리고 나서 허공에 아련히 걸리고 귀에도 남는 그런 계속되는 떨림을 음산한 주제에 부여했다.”

실제로 <어둠의 심연>의 도입부, 즉 저물어가는 템즈강에 대한 묘사는 그 음산한 풍경만으로 주제의 강렬함을 표상한다. “안개는 마치 빛나는 투명 직물로 만든 커튼처럼 내륙의 울창한 산지에 높이 걸렸고, 그 아랫자락은 비치는 주름장식처럼 저지대의 해안가를 드리우고 있었다. 상류의 탁 트인 유역을 뒤덮은 서쪽의 어둠만이 태양의 접근에 분격한 듯 시시각각으로 더욱 음산해졌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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