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 대한문 앞 수문장 교대식은 전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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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교대식은 그 의례와 복식과 절차의 근거가 희박하여, 어렵게 현재의 이벤트 양식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그 행사의 원형이 된 영국 비킹엄궁의 수문장 교대식도 19세기 ‘대영제국’이 ‘만들어낸 전통’이었다.

<만들어진 전통> 표지

<만들어진 전통> 표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소서노의 큰아들 비류는 마침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시나리오 작가, 게임 제작자, 영화감독, 웹툰 작가 등은 얼마든지 상상력의 극한을 추구하여 흥미진진한 드라마나 영화나 만화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디즈니랜드에 가서도 놀고, <스타워즈>라는 영화도 보고, <반지의 제왕> 같은 거대한 허구의 세계에도 몰입한다. 그러니 <삼국사기>의 단 한 줄을 가지고 드라마와 뮤지컬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문화 콘텐츠 상상력의 측면에서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 관건은 그 상상력이 잘 만들어졌는가, 재미있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만한 매혹의 ‘판타스마고리아’인가 하는 점뿐이다.

그런데 이를 아예 공식 역사화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소서노라는 인물을 두고 인천의 남동구와 연수구는 한동안 ‘저작권’ 대결을 벌였다. 두 지자체는 ‘사료 고증’이라는 기초 과정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 귀한 세금을 들여서 각종 사업을 진행했다.

인천 남동구와 연수구의 ‘소서노 전쟁’

남동구는 기존의 소래포구 축제에 소서노 캐릭터를 결합하여 거리 퍼레이드, 각종 공연, 특별 전시, 가무극 등을 선보였다. 심지어 ‘소래’를 ‘소서노가 도래’한 곳이라는 식의 주장마저 펼치면서 수인선 전철 소래포구역을 소서노역으로 개칭하려고까지 했다. 포구의 근대 역사가 허구의 소서노로 뒤바뀔 뻔했다. 소서노 인문학 강좌에 소서노 리더십 특강, 그리고 심지어 소서노 사당 건립 같은 계획까지 수립했었다. 정작 이 많은 공공 문화산업의 근거가 되는 문서에 보면 소서노에 관한 대목은 대체로 ‘추정된다’ ‘유추된다’는 것이다.

이에 질세라, 인접한 연수구에서는 ‘소서노’가 온 곳은 문학산 일대이고 따라서 ‘소서노’는 연수구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관내의 공원이나 중요한 길목을 새로 조성하여 무려 길이 12m, 폭 4m, 높이 9m 규모의 소서노 동상 건립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해당 대목 및 여러 사료를 종합 판단하여 백제의 시조를 ‘비류설’과 ‘온조설’로 나누고, 비류설에는 소서노를 모시고 미추홀로 왔다는 내용을 일단 구절은 인정하지만, 대체로는 온조설을 정사(正史)로 추스르고 있다. 아니, 실제로 소서노가 인천에 왔다고 해도 오래 전에 ‘왔다’는 바로 그 문장 하나로 상상 초월의 문화사업이 전개되는 것은 위험하다. 동상을 실제로 제작한다면 어떤 형상으로 할 것인가. 계획상으로 보면 크기도 무려 9m에 달하는데 말이다. 아마도 배우 한혜진씨가 드라마 <주몽>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과 엇비슷하게 재현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소서노와 관련된 남동구의 여러 행사들, 그 홍보물들을 보면,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 정도로 보인다.

인천의 근현대사, 그 거친 삶을 살아낸 인천의 진짜 삶과 진짜 기억들, 인천의 개항과 산업화 과정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가난과 눈물과 한숨을 말갛게 지우고 나니, 근현대의 기억 공간이 텅 비게 되고,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려 2000여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의 인물, 그것도 인천 사람들이 실제로 그 역사성을 인정하고 존중했다기보다는 솔직히 드라마 <주몽>의 인기에 서둘러 편승한 인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인천뿐만 아니라, 이 한반도의 도시들은 근현대의 진짜 기억 대신 가짜 기억이나 가공된 캐릭터에 세금을 쏟아부으면서 그 무슨 문화 콘텐츠 사업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해괴하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이를 ‘만들어진 전통’ 혹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에릭 홉스봄이 그의 학문적 동료들과 함께 쓴 <만들어진 전통>이나 베네딕트 앤더슨이 근대국가의 성격을 해부한 <상상의 공동체>는 거대 담론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우리가 나날이 마주치는 이 도시들의 공허한 문화사업들을 판단하기에 적절한 나침반이다.

기본적으로 <만들어진 전통>의 저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가 근대 역사의 격변 속에서 지배권력이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빚어낸 ‘근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서유럽의 많은 정치적 상징물이나 의례들, 문화적 전통이나 관습들이 기껏해야 100~200년 전에 세상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가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 킬트다. 나도 두 번이나 스코틀랜드에 가보았고 그곳의 역사적 유산인 에딘버러성에 올라갔었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성 아래 펼쳐진 엄청난 옷가게와 그 가게 안에 진열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 킬트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바로 이 격자무늬 치마에 농축되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전통>에 따르면, 백파이프 연주를 하면서 행진을 하는 의례들에서 익숙하게 본 이 남성용 짧은 치마의 역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0년이 되지 않는다.

‘홍익인간’과 ‘백의민족’을 만들어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격자무늬 치마를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니라 이들을 침략하고 지배한 잉글랜드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강제 병합된다. 강물처럼 피를 흘리며 잉글랜드에 맞섰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자존심 센 지역 사람들은 잉글랜드 여왕 밑에서 살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병합되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난 뒤 잉글랜드 랭커셔 출신의 제철업자 토머스 로린슨이 연료용 목재를 대량으로 구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삼림을 벌채하게 되는데, 이때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거 인부로 고용하게 된다. 이들에게 산 속에서 일하기 편하도록 입힌 옷이 킬트였다. 잉글랜드 자본가가 스코틀랜드 노동자들의 노동을 위해 고안한 격자무늬 치마는 19세기 이후 유럽 전역이 민족주의 열광에 사로잡히면서 저마다의 인종적 뿌리, 언어의 원천, 문화적 원형, 정치적 상징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때 스코틀랜드도 이 치마를 오랜 전통 의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만들어진 전통>의 ‘서장-전통들을 발명해내기’에서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전통의 발명이 더 자주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사회가 급속히 변형됨으로써 ‘낡은’ 전통이 기반하고 있던 사회적 패턴들이 약화되거나 파괴되어 그 결과 낡은 전통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질 때나, 아니면 낡은 전통과 그것들을 제도적으로 매개하고 보급하는 수단이 더 이상 융통성 있게 적응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나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을 때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유럽과 달리, 그 열기와 강도와 동원이 강력한 국가적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향토색’, 이승만 정권 때의 ‘홍익인간’, 박정희 정권 때의 ‘백의민족’ 등의 신드롬에 의하여 수많은 의례와 조형물과 상징물이 만들어졌거니와 나라와 도시를 상품화하는 경향이 거세진 21세기 전후로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거나 ‘소서노 갈등’처럼 각 지자체들이 한 줌도 안 되는 요소를 역사화·장면화·상품화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문 앞의 수문장 교대식은 그 의례와 복식과 절차의 근거가 희박하여, 어렵게 현재의 이벤트 양식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그 행사의 원형이 된 영국 비킹엄궁의 수문장 교대식도 19세기 ‘대영제국’이 ‘만들어낸 전통’이니, 도대체 이런 행렬의 최초 원형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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