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마르크스-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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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글이, 또는 선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통하던 어떤 시기를 우리도 짧지만 열사병처럼 통과해왔다는 아련한 회상을 던져준다.

제목 청년 마르크스

원제 Le jeune Karl Marx

감독 라울 펙

출연 오거스트 딜, 스테판 코나스케, 빅키 크리엡스, 올리비에 구르메

상영시간 1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8년 5월 17일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스크린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던가. 구 사회주의권, 러시아나 동구권 영화를 꽤 봤는데 기억엔 없다. ‘정원 꽃에 물을 주며 김일성스런 미소를 띠고 있는 요제프 스탈린’ 시퀀스 같은 것은 기억나는데. 칼 마르크스. ‘맑스’로 쓰면 꼭 ‘마르크스’로 교정되어 나오는 그 인물.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혜성처럼 나타나 현재까지 배회하는 유령’ 같은 사상가. 이제는 장년이 된 86세대 운동권 다수가 세상 현실에 눈을 뜨는 데(당시 공안당국은 ‘의식화’라고 불렀다) 빚을 졌던 인물.

조롱의 대상이었던 인물들 여럿 등장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라인신문 편집장 시절 겪는 필화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1818년 5월 5일 생이다.(올해가 탄생 200주년이다!) 그가 라인신문 편집장을 맡은 게 1842년이니 24살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영화는 독일 베를린에서 프랑스 파리로, 추방되어 다시 벨기에 브뤼셀을 전전하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할 때까지의 일대기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총 6년의 여정을 다룬다.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는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은 대학시절 그가 몸을 담았던 청년 헤겔 좌파들의 관념철학을 뒤집은 것이었고, <철학의 빈곤>은 알려진 것처럼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의 제목을 뒤집어 비아냥거린 것이었다. 영화는 그의 저서들과 편지들에서 한껏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을 줄지어 등장시킨다. 프루동, 바이틀링, 루게, 심지어 바쿠닌까지! (무정부주의자가 모이는 살롱에서 바쿠닌과 마르크스가 실제로 체스를 둔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인물을 언급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이자 공동저자, 편집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다. 그는 이 시기에 마르크스와 ‘의기투합’을 하는데 영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보다 어린 시절 한 번 조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영화가 묘사하는 마르크스의 성격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사회과학서적 출판 붐을 타고 번역 출판된 소비에트판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전기에 따르면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더 젊은 시절,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생운동권에다가 술에 취하면 길거리 가로등을 깨는 악취미를 가진, 조금 막가파스러운 괴짜청년이었다. 귀족 딸 예니를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하고, 야반도주한 뒤에는 정신을 차렸을까.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자존심은 세서 남에게 손을 벌리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를 만난 자리에서도 ‘하층민을 짝사랑하는 부르주아지 아들의 위선’을 공격하다니! 실은 속으로 엥겔스의 책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반했으면서도. 요즘 은어로 이야기하면 전형적인 ‘츤데레’다.

영화를 보면 그의 성격은 자신의 글들과 꼭 닮았다. 이제 막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남자가 신사복장을 하고 길을 걸으며,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당대의 사상가를 자신의 운동에 끌어들이기 위해 비위를 맞추다가도 면전에서 비판하고, 엥겔스 부친의 친구인 자산가를 만나서는 아동노동의 부당함과 생산관계에 대해 논쟁하는 그런 장면을 보는 건 신기했다. 동시에 여전히 글이, 또는 선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통하던 어떤 시기를 우리도 짧지만 열사병처럼 통과해 왔다는 아련한 회상을 던져준다.

영화와 딱맞는 밥 딜런의 엔딩곡

이전부터 궁금했던 건 많은 영화감독들이 생각했던 프로젝트-<자본론>의 영화화-는 왜 아직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의 김선·김곡 형제 감독은 아직 젊은 독립감독이니 그렇다 치고, 이를테면 <전함 포템킨>의 에이젠쉬타인도 필생의 과업이었는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자본론>은 없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흔히 ‘후기 마르크스’로 불리는 1848년 이후 대표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나 <임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 <자본> 집필시기는 다루지 않고 있다. 만약

<자본론>이 영화화된다면 이 영화를 감독한 라울 펙이 적임자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엔 에릭홉스봄이 장기19세기와 대비해 만든 개념인 ‘단기20세기’(1945년 이후 소비에트 몰락까지)에 해당하는 주요 사건과 인물들의 다큐필름이 나열되고 있다. 체 게바라, 베트남전, 케네디,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까지. 이들이 모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일까. 아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으로 기억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이전 19세기에 원류에 해당하는 인물 마르크스가 있었다는 것이겠지. 밥 딜런의 노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이 엔딩에 같이 흐르는데, 이 노래만큼 영화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과 딱 들어맞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추천작이다.

마르크스의 여인들

마르크스의 여섯 번째 딸 엘리노어 마르크스 | 경향 자료사진

마르크스의 여섯 번째 딸 엘리노어 마르크스 | 경향 자료사진

마르크스의 여인들-이라고 쓰고 보니 뭔가 <김정일가의 여인들>(실제 책 제목이다)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영화는 그의 부인 예니 마르크스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며, 돈도 안되는 책 쓸 궁리만 하고 있는 남편 옆에서 그녀의 고생…그런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동지이자 남편 저서에 대한 최초 비평가, 인생 동지로서 그녀의 삶도 영화는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스탈린 시대에 정형화된 공식-혁명가의 내조를 통해 그녀 자신의 삶도 실현할 수 있었다는 식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마르크스에 대한 인신공격이 자신의 딸을 굶겨 죽이면서도 부르주아적 삶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비난이다. 이건 어쩌면 좌파 사상가들에게는 숙명적인, 그리고 비판하는 쪽에서는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무기이리라. 프롤레타리아트 내지는 민중을 위한다는 사상과 삶이 모순된다는 건 간단히 ‘위선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쉽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나온다. 하녀 렌헨이다. 예니가 친가에 경제적 궁핍을 호소하자 친가에서 보내준 하녀다. 영화에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자기 부인이 생활비를 마련하러 떠난 사이에 이 하녀를 건드려 애를 낳는다. ‘위선자 마르크스’ 공격의 ‘핵심템’이기도 하다. 곤경에 처한 마르크스를 구해준 건 다시 엥겔스였다. ‘그 애는 내가 낳은 아이’라고 둘러대 자신의 세례명을 아이의 이름으로 쓰기도 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후 갈 데가 없어진 렌헨을 거둬 가정부로 고용했는데, 엥겔스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에게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 불륜은 세상에 알려졌다. 부모들이 붙여준 ‘투씨’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진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엘리노어는 노조운동, 제2인터내셔널 창립운동 등에 관여하다가 43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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