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의 시대’ 를 자학하고 힐난한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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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 살아야 했으며 세상의 거악에는 팔뚝질 못하고 설렁탕에 왜 고기가 이거뿐이냐고 심술이나 부리며 사는 소시민의 속물성, 그 자체를 거침없이 자학하고 힐난하는 글이 바로 ‘이 거룩한 속물들’이다.

“부르도자는 고독하다.”

김수영(1921~1968)

김수영(1921~1968)

캬하! 역시 인디 다큐멘터리에서 뛰는 감독들의 작명 방식은 독특하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했다. 마치 인디밴드 ‘연신내 휘발유’ 같은 느낌 말이다. 어떤 일로 ‘인천 다큐멘터리 포트’를 찾아보다가 발견한, 현재 제작 진행 중인 선호빈 감독의 다큐 제목이다. 한국 및 아시아 지역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원하는 펀딩 플랫폼이 인천 다큐멘터리 포트다. 2017년, 지원 선정과정에서 선호빈 감독이 ‘부르도자는 고독하다’는 제목의 작품 기획을 설명했다. ‘불도저 시장’이라 불리는 14대 서울시장 김현옥을 중심으로 개발도상국 시절의 수도 서울이 어떻게 강력한 직선의 도시로 변화하였는가를 다루는 작품이다.

그래서 더 살펴봤더니, 이 절묘한 제목은 선호빈 감독의 선택적 착상이지만, 원래 김현옥 시장의 기고문 제목이었다. 1967년 5월에 발간된 <동서춘추>에 같은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장차 강변북로, 세운상가, 윤중제, 북악스카이웨이, 남산1·2호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등을 추진하는 당시 김현옥 시장의 어떤 야심이 역설의 제목으로 나타나 있다.

종합 교양지성지라고 할 만한 <동서춘추>에는 이 글 말고도, 당대 기라성들의 칼럼과 시와 여행기가 실려 있다. 권두에는 ‘컬러 세계여행-인도네시아 편’이 실려 있고,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 코너에는 ‘고려테니스클럽’이 소개되어 있으며, 발행인 김종완의 창간사가 이어진다. 그리고는 양주동, 안수길, 이가원, 박목월, 김춘수, 김현승, 김태길, 곽복록, 천경자, 박화목, 예용해, 이범선, 이병주, 이어령, 정진숙, 지명관, 송건호, 신상옥, 남정현, 김주연, 박태순 등이 총출연한다.

그 명단에 김수영이 있다. 김수영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산문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 이 글에는 김수영의 밭은 기침, 김수영의 성마르고 까칠한 태도, 김수영의 탁한 세상을 바라보는 탁한 눈빛, 김수영이 제 발등을 스스로 찍어대며 흡사 절규라도 하는 듯한 환멸, 5·16 이후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 살아야 했으며 세상의 거악에는 팔뚝질 못하고 설렁탕에 왜 고기가 이거뿐이냐고 심술이나 부리며 사는 소시민의 속물성, 그 자체를 거침없이 자학하고 힐난하는 글이 바로 ‘이 거룩한 속물들’이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후생인의 한가로운 독후감으로 보자면, 김수영이 의도하고 쓴 것은 아니겠으나 <동서춘추>의 창간호, 그 목차에 나열된 기라성들과 그 제목들을 두루 일별해 보면, 미필적 고의로 김수영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당대의 교양적 분위기 자체를 어떤 면에서는 ‘속물적’이라고 ‘자폭’하고 있다. “‘속물론’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렇다는 것은 김수영 스스로도 6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속물성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지만 <동서춘추>라는 종합교양지가 당대의 ‘속물성’에 대해 일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 보자.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 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은 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 걸……. 그런 것만도 아닐 걸…….”

김수영은 ‘그런 것만도 아닐 걸’이라고 두 번 쓴다. 그러니까 혼잣말처럼 두 번 읊조린다. 자탄의 한숨소리가 배어 있다.

이 산문은 2000년에 발굴되어 <창작과 비평> 2001 여름호에 게재되었고 그 이후 김수영의 산문 전집에 증보로 수록되었다. 이 서지학적 과정을 참고하여 보자.

<김수영전집 1,2>

<김수영전집 1,2>

사후 50주년 기념으로 증보 출간

70·80년대에 김수영의 세계는 참여, 저항, 실천 등과 연관된 ‘자유’를 한 축으로 하고 곧은 시선, 정직한 묘사, 세계의 이면 등을 꿰뚫는 ‘사랑’의 힘을 한 축으로 하여 해석되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라고 1960년의 일기에 쓴 김수영은 1968년의 유명한 문학논쟁에서 “획일주의가 강요한 대제도의 유형무형의 문화기관의 ‘에이전트’들의 검열”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대명사가 바로 질서라는 것”이라고 통박하였다. 이것은 문학이나 예술의 자유를 넘어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 삶 자체의 자유로 이어지고 끝내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라는 사랑의 유토피아 찬가로 이어진다.

동시에, 위 산문을 지렛대 삼아 90년대 이후 아니 적어도 최근 십여 년 안팎에 김수영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키워드를 꼽자면 역시 ‘속물성’이다. 자유와 사랑이 가로막힌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속물성!

다시, 위의 산문 중 한 대목을 읽어본다.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시작한 속물의 매문행위·매명행위는 어떻게 되는가. 이어지는 글에 의하면 ‘비어 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기도 하고 베스트셀러라도 내서 ‘자가용 차를 살 꿈도 꾸고, 펜클럽 대회가 파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 신경을 쓰게 된다. 김수영은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 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무렵의 속물성, 도시 전체에 드리워진 속물의 공기를 두 손으로 휘젓는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는 지옥이다.”

이 지옥도의 풍경, 그로부터 50여년 동안 오히려 심화되고 확장되어,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는 물론 안 보이는 마음속 풍경까지 혼탁하게 드리워진 속물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래서 김수영의 글은 또 읽게 되고, 되풀이하여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에 사후 50주년 기념으로 그의 시와 산문이 새롭게 증보되어 출간되었다. 마침 4·19도 가까운 때라 정독하여 다시 읽어보니, 엊그제 발표된 글인 듯 당대의 표적을 향한 화살이 시공을 넘어 오늘의 상황에까지 날아와 꽂히는 것을 여러 번 느끼게 된다.

오랫동안, 꾸준히, 이 작업을 도맡아 해온 문학평론가 이영준은 시 전집과 산문 전집 앞에 서문을 썼는데, 각각은 다음과 같다.

“2003년 개정판이 나온 이후에 발굴되어 김수영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문의 양은 매우 많다. 전쟁 직후의 초기 산문이 상당량 발굴된 것은 김수영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중에서도 시인이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탈출한 뒤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정을 설명하는 산문은 발견의 놀람에 값한다.”(산문 전집 서문)

“이 전집을 꾸리는 일에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들은 유족이다. 특히 김수명 선생은 원고를 챙기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대조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잘못을 바로잡는 편집자의 자세를 놓치지 않으셨다. 소중한 원고를 보존해 왔으며 각종 자료를 모아서 수시로 엮은이에게 전달한 유족의 노고를 독자들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시 전집 서문)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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