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세계 과학계 선두에 있던 ‘세종시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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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운은 한국과학사의 실질적인 제1세대로서,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알렸을 뿐 아니라 한국 과학기술사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66년 기념비적인 통사 <한국 과학기술사>를 펴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사극의 단골 소재로 사랑 받아 왔다. 대략 10년에 한 번꼴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제작됐는데 이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촬영이나 제작기법이 발전할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가 쌓아 올린 연구 성과가 반영돼 내용도 풍성해지곤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만든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이 많아지고 역할도 다양해진다. 여기에는 가상의 인물도 있지만 역사가들이 새롭게 발굴한 인물들이 많다. 인물에 대한 해석도 선인과 악인이 대립하는 단순한 구도를 벗어나 점점 입체적으로 되어 왔다.

201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장영실>.

201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장영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세종

최근에 세종을 다룬 드라마의 특징 중 하나는 극중에서 과학기술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자격루와 앙부일구 등 천문 관측기구(의기)의 제조, 그것들을 활용한 조선의 독자적 천문 관측과 칠정산의 제작, 훈민정음의 창제와 아악의 정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과학기술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점점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요즘에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업적보다 과학기술 또는 문화 쪽 업적들이 더 많이 다뤄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한국방송공사의 <장영실>(2016)처럼 아예 장영실을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도 있다.

세종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스스로도 과학기술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두뇌들을 집현전에 모아 조선의 문물제도를 확립할 수 있도록 지휘했다는 점이 주요 업적이다. 요즘 말로는 프로젝트 매니저 또는 연구소장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세종을 과학 군주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일까.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은 유학만 숭상하고 기술을 천시해 발전하지 못했다는 식민사학을 널리 퍼뜨렸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면서도 이 주장을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여기에는 패배한 조선왕조에 대한 실망감도 한몫 했다. 박정희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만들면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라거나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는 말을 굳이 집어넣은 것도 그가 식민사학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은 식민사학이 퍼뜨린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갈래로 노력했다. 특히 “조선이 기술을 천시하여 쇠망했다”는 주장에 맞서기 위해 선조들이 남긴 발명과 발견의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과학기술사의 효시가 됐다. 1930년대쯤에는 고려청자, 거북선, 금속활자, 첨성대, 석굴암 등 과학기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들의 목록이 대략 정리되었고, 이 목록은 “한국에 과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라는 반론의 증거로 오늘날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발명과 발견의 목록을 써내려가는 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역사는 일관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어야 의미를 지닌다. 이 목록에 나열된 발명과 발견들을 묶어주는 큰 줄기가 잡혀야 한국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1세대 과학사가인 전상운 박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1세대 과학사가인 전상운 박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점에서 세종시대는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문물제도가 확립된 시대일 뿐 아니라 5000년 전통 과학기술사의 정점으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세종시대라는 봉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전통과학사는 유물과 발명품으로 단편적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라, 수천 년의 발전이 누적돼 화려한 꽃을 피웠다는 서사를 얻게 됐다.

최초의 영문 한국 과학기술사 통사 펴내

연구자들은 세종시대 과학기술이 세계사적으로 어떤 수준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누가 그 과업을 실제로 수행했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도 홍이섭의 <조선과학사>(1944)와 같은 선구적 업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다. 전상운(1928∼2018)이 일본에서, 박성래와 송상용 등이 미국에서 전문적인 과학기술사 연구를 익히고 귀국해 제자를 기르고 저술과 강연을 통해 과학기술사의 저변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연구 성과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전통과학의 성취에 대한 재평가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영실, 이천, 이순지, 김담, 최해산 등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일선에 서 있던 이들의 이름도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장영실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까지도 역사가들만 알고 있었지만, 한국방송공사의 드라마 시리즈 <조선왕조 오백년> 중 <뿌리 깊은 나무>(1983)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면서 전국민에게 확실히 인상을 남겼다. 이후 장영실은 세종시대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대왕 세종>(2008)을 거쳐 <장영실>(2016)에서는 세계적인 천재 과학자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전상운은 한국과학사의 실질적인 제1세대로서,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알렸을 뿐 아니라 한국 과학기술사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66년 기념비적인 통사 <한국 과학기술사>를 펴내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앉은 비굴한 사대주의와 오만한 과대망상증을 떨쳐버리고, 스스로를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를 수정·보완하여 1974년에는 미국 MIT 출판부에서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 Traditional Instruments and Techniques>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영문 한국 과학기술사 통사를 냈다.

그는 한국 독자들의 자존심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과학사학계에도 한국 과학기술의 성취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를 위해 과학사 사전에 수록된 시대별 주요 업적을 비교해 15세기 전반기에는 조선과 관련된 항목이 다른 모든 나라 관련 항목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슬람 과학기술이 전성기를 지나 침체에 접어들고 중국에서는 원에서 명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시점, 세종시대 조선은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세계 과학계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 전상운이 평생의 연구를 통해 보이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런 업적을 뒤로 한 채 전상운 교수는 지난 1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대중에게 과학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당시 그는 줄기를 세웠다. 그 줄기 사이에 가지와 잎을 채우는 것은 남아있는 후학들의 몫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 과학기술사는 더 다채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채로워질수록 우리가 한국사를 즐길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해질 것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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