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올해는 ‘황금개’가 아니고 ‘누렁개’의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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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색을 하고 나서면 “어차피 오행 같은 것은 미신일 뿐인데 그리 까다롭게 따지고 들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을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속신의 세계에서는 오행도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줄 핑곗거리일 뿐이다.

양력으로는 2018년 새해가 왔지만 음력으로는 정유년이 끝나지 않았다. 음력으로는 아직 섣달도 아니고 동짓달이건만, ‘황금개띠해’니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간지를 따지면 새해는 무술(戊戌)년이므로 ‘누런 개의 해’는 맞다. 십간에서 무(戊)와 기(己)는 노랑색에 해당하며, 십이지에서 술(戌)은 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와 ‘기’가 노란색인 것은 이들이 오행 가운데 토(土)와 대응하기 때문이다. (열 천간 중 갑과 을, 병과 정, 무와 기, 경과 신, 임과 계가 각각 오행 중 목, 화, 토, 금, 수에 대응한다.) ‘금 강아지’의 해를 굳이 찾자면 무술년이 아니고 경술(庚戌)년일 것이다. 오행 중 금(金)은 색으로는 흰색에 대응하므로 황금 강아지가 아니고 플래티넘 강아지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런데도 ‘누렁개’가 ‘황금개’라고 슬쩍 눙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속된 욕심일 뿐이다.

무술년 첫날 진돗개 대한이와 민국이가 전남 진도 가계해변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무술년 첫날 진돗개 대한이와 민국이가 전남 진도 가계해변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황금돼지띠’ 내막 알면 허탈해 할지도

이렇게 정색을 하고 나서면 “어차피 오행 같은 것은 미신일 뿐인데 그리 까다롭게 따지고 들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을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속신의 세계에서는 오행도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줄 핑곗거리일 뿐이다. 예컨대 2007년 정해(丁亥)년에 ‘황금돼지해’를 내세워 온갖 장삿속이 판을 쳤지만, 정(丁)은 오행 중 화(火)에 해당하므로 사실은 누렁 돼지도 아니고 붉은 돼지의 해였을 뿐이다. 2020년대 중반 유달리 심한 입시경쟁을 겪게 될 ‘황금돼지띠’ 아이들은 그 내막을 알고 나면 허탈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행이라는 사고체계 전체를 ‘미신’이라는 한마디로 웃어넘기는 것도 가벼운 처사일 것이다. 오행은 자연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옛사람들이 기울였던 지난한 노력의 한 결실이다. 그들이 가진 정보가 오늘날의 우리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이 수립한 체계도 현대인의 눈에는 헐거워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세계에서 질서를 읽어내고 싶어한다. 쉽게 읽히지 않으면 인간이 질서를 부여해서라도 자연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광활한 세계의 혼돈과 무한을 그대로 맞닥뜨려 감당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분류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가장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다. 삼라만상의 복잡다단함을 다섯 갈래로 묶을 수 있다면 그나마 세상을 이해하기가 한결 편해지지 않겠는가?

오행은 이른바 ‘상관적 사고’를 통해 물질, 색깔, 방위, 오장육부, 도덕 등 서로 다른 범주들을 연결시킴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이들 각각을 다섯 갈래로 묶고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적용하면 자연세계에 대해 상당히 복잡한 수준의 설명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간(肝)은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하므로, 간이 좋지 않아 생긴 병에는 나무를 살리는 물의 성질을 지닌 약재를 처방한다는 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동아시아에서만 독특한 것도 아니었고,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 체계와 이론도 없는 것보다는 불완전하나마 체계와 이론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이 대체로 더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과학의 발전과정은 ‘오답’의 축적과정

이런 점에 수긍한다 해도 “그래 봐야 오행 같은 이야기는 이미 기각된 ‘오류’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다시 나올 수 있다. 옛사람들의 노력은 인정하더라도 흘러간 시행착오일 뿐인데 이미 현대과학의 ‘정답’을 알고 있는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일 것이다.

물론 오행 체계가 그려내는 자연상은 현대과학이 보여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답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오답’이 ‘헛수고’와 같은 뜻은 아니다. (특히 다년간의 시험공부로 단련된 한국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백지 답안지를 내면 아무 변화도 성장도 일어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답을 제시해 보고 그것이 어디가 틀렸는지 검토해 보는 과정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현대화학의 기본이 되는 주기율의 발견을 예로 들어보자.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주기율표는 1869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완성한 것이다. 라부아지에가 1789년 <화학원론>에서 근대적인 ‘원소’라는 개념을 정립한 이래 80년 동안 수십 개의 원소들을 분류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과학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내놓았다.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obereiner·1780∼1849)는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를 3개씩 묶어서 ‘세 쌍 원소의 법칙’(1817)을 제안했고, 뉴랜즈(John Newlands·1837∼1898)는 원자량 순서대로 8개씩 원소를 묶어 보자고 ‘옥타브의 법칙’(1864)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일부 원소에는 잘 적용되었지만 19세기 화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원소들이 계속 발견되자 힘을 잃고 말았다. 멘델레예프는 이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당대의 새로운 발견을 아우를 수 있는 체계를 궁리한 끝에 현대적 주기율표를 만들 수 있었다. 즉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과감한 이론을 내놓은 선구자들의 ‘오답 노트’가 없었다면, 뒷날 더 풍부한 설명력을 갖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도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과학도 모두 오답에서 출발했다. 뛰어난 천재들도 자연의 복잡함을 혼자 힘으로 꿰뚫어 볼 수는 없다. 과학사의 수많은 천재들이 다음 세대에 자신의 어깨를 내어준 덕에 과학은 한 발씩 더 높이 올라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행 이론과 같은 동아시아의 전통과학도 흘러간 옛이야기라고 웃어넘길 것은 아니다. 그 결론이 현대과학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해도, 우리는 선현들이 쌓아올린 사유의 토대 위에서 출발했고 그 토대는 다른 문명과 비교해서 결코 낮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행을 자꾸 ‘미신’과 결부시키는 것은 부당한 평가다. 사기꾼과 돌팔이들이 당시 가장 합리적인 과학이었던 오행 이론의 권위를 등에 업은 것이지, 오행 이론 자체가 미신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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