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 많던 ‘포마토’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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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목표를 제시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틀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구체적인 목표와 그것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만 바뀌어 왔을 뿐이다.

세대마다 공유하는 경험이 있고, 그 경험들을 대표하는 지배적인 이미지가 있다.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이미지도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실 1960년대까지는 뚜렷하게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굳이 꼽자면 미국이 주도한 원자력 관련 기술원조 덕에 ‘제3의 불’이라는 별명이나 원자 모형의 그림 등이 대중에게 알려지기는 했다. 그러나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1979년에야 운전을 시작했으므로 1960년대의 원자력에 대한 이미지는 막연한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밖에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소식도 큰 뉴스가 되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1989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금성'(현 LG전자) 광고. 인간을 돕는 로봇과 반도체는 1980년대 후반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광고 카피로 사용한 '테크노피아'는 오늘날 '4차산업'의 원조라 할 수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1989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금성'(현 LG전자) 광고. 인간을 돕는 로봇과 반도체는 1980년대 후반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광고 카피로 사용한 '테크노피아'는 오늘날 '4차산업'의 원조라 할 수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를 지배한 키워드들

과학기술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무렵부터라고 할 수 있다. 유신정부가 1973년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면서 전국적으로 여러 가지 과학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이 줄을 이었다. 다만 그 내용은 대체로 “과학이 중요하다”거나 “우리 생활 속에 미신과 비과학적 요소가 이렇게 많으니 개선해 나가자”는 계몽에 머물렀다. 1970년대 말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들에 대한 거국적 환영행사와 1979년 시작된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 등의 행사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과학기술이 개인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에 중요하다는 인식은 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나, 정작 각종 사업에서 강조한 것은 과학기술의 탐구 자체보다는 그것의 응용이었다.

1980년대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풍성해졌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 구별된다. 한국방송공사(KBS)는 1983년에만 ‘우주박람회’와 ‘83로보트과학전’ 등 2개의 대형 전시를 열었다. 우주박람회는 아폴로와 제미니 계획에서 실제 사용한 우주선 캡슐 등을 전시했고, 83로보트과학전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로봇 등 다양한 볼거리로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대체로 일본 전시를 들여온 것이고 운영의 부실함으로 말도 많았지만, 이런 대형 전시는 우주나 로봇 등이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실체를 갖춘 기술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했다.

또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도 1980년 출간과 동시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토플러를 통해 한국에 ‘정보화 사회’라는 개념이 알려졌고 미래를 위해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아직은 놀랄 만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개인용 컴퓨터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고, 전국의 타자학원들은 하나둘씩 컴퓨터학원으로 탈바꿈했다.

1980년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이미지 중 ‘포마토(pomato)’가 있다. 뿌리에는 감자가, 열매로는 토마토가 열리는 이 신기한 작물은 1978년 독일에서 개발한 것인데, 전두환 정부가 유전공학을 국가적으로 진흥하기로 결정한 무렵인 1981년부터 국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었고 이윽고 1980년대 내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과학의 달 포스터 그리기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신문과 잡지들은 “첨단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포마토와 같은 새로운 작물을 만들어내면 인구 폭발에 따른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곤 했다.

그런데 생명체의 물질대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 그루의 식물에서 토마토와 감자가 같이 열린다고 해서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날 수는 없다. 과채 농사를 지으면서 큰 열매를 얻기 위해 작은 열매를 솎아 개수를 조절해본 적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포마토를 개발한 이들도 새로운 기술을 응용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이지, 이것으로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구석구석 과학사](14) 그 많던 ‘포마토’는 누가 다 먹었을까

범람하는 이미지에 끌려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마토의 이미지가 계속 유행했던 것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유전공학 진흥은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포마토는 유전공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전자공학과 컴퓨터 관련 산업의 육성도 정부의 과학기술 청사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주요 언론들이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번역도 되기 전부터 그 내용을 앞다퉈 소개한 것도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이미지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1980년대에 형성된 과학기술의 이미지들은 사실 조금씩 모습을 다듬어가면서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포마토가 상징했던 유전공학은 수정란에 피펫을 찔러넣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바이오테크놀로지’로 조금 세련되어졌고, ‘정보화사회’는 ‘테크노피아’와 ‘인터넷 코리아’를 거쳐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희대의 유행어로 진화했다.

물론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국가가 응당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가 앞장서서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형성한 결과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의 한 가지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과학기술을 부국강병의 도구로 여기고, 군사작전처럼 국가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 20세기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국가가 목표를 제시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틀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구체적인 목표와 그것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만 바뀌어 왔을 뿐이다. 포마토가 잊힌 자리에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이 들어와 있다. 이 이미지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누구의 양보나 절제를 요구하는가? 바야흐로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의 틀이 잡히고 막대한 예산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금이야말로 현란한 이미지를 좇아가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을 주시해야 범람하는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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