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존경과 흠모’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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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해 명예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과학자. 이런 영웅적인 과학자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한, 이휘소건 황우석이건 다음의 누구건 ‘존경과 흠모를 불러일으키는’ 영웅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2005년 11월 황우석 연구팀의 줄기세포 연구 부정행위 논란으로 전국이 달아올랐을 무렵, 인터넷 여기저기에는 황우석을 재미 한인 물리학자 이휘소(Benjamin Whisoh Lee·1935~1977)와 비교하는 글이 올라왔다. 황우석의 지지자들은 이휘소가 자주국방을 위한 핵무기의 설계도를 완성해 한국에 전달하기 직전에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당했다는, 잘 알려진 소문의 구조를 그대로 빌려 와서 주인공만 황우석으로 바꾸었다. 황우석 연구팀이 한국을 세계 줄기세포 연구의 선두주자로 밀어올릴 연구를 완성하기 직전에 미국의 견제와 배신으로 누명을 쓰고 인격살인을 당했다는 주장들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 나갔다.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의혹이 대부분 사실로 판명되고 황우석에 대한 지지세가 꺾이면서 이 주장들 또한 자취를 감췄지만,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다시 확인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전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이휘소를 기억하는 방식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휘소 박사(왼쪽) 황우석 박사(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휘소 박사(왼쪽) 황우석 박사(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명예훼손에 대한 법원의 흥미로운 판단

1993년 출판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사실 1년 전에 출판했다가 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한 소설 <플루토늄의 행방>을 개작하고 제목을 바꾸어 새로 낸 것이었다. 하지만 북핵 위기 등 시운을 잘 탄 덕에 300만부 넘게 팔려 나가며 전국적 베스트셀러가 됐고, 1995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소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휘소의 유가족들이 작가와 출판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 여러 가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이휘소가 박정희 정부의 독재정치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유신독재에 협조해 핵무기 개발계획을 주도했던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이 책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과 소설의 출판 금지 등을 요구했다.

서울지방법원은 1995년 6월 이 소송을 기각함으로써 피고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판결문의 다음 대목에 드러난 재판부의 판단은 매우 흥미롭다. 이휘소를 모델로 한 소설의 등장인물인 ‘이용후’가 “외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핵무기 개발을 주도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위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위 소설을 읽는 우리나라 독자들로 하여금 위 이휘소에 대하여 존경과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것이어서, 우리 사회에서 위 이휘소의 명예가 더욱 높아졌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이 소설 때문에 이휘소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서울지법 94카합9230)

요컨대, 소설의 내용이 허위이더라도 그로 인해 이휘소에 대한 평판이 좋아진다면 명예 훼손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에 대한 ‘존경과 흠모’인가? 과연 ‘아, 사실이 아니지만 애국자였다니, 사실이 아닌 것은 알지만 존경스럽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었을까? 유가족은 이 궤변 같은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후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일절 응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포스터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포스터

신화의 불씨는 왜 꺼지지 않는가

이휘소의 유가족이나 제자 등은 그를 둘러싼 억측과 풍설을 바로 잡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위 소송이 벌어지기 전에도 비슷한 주장을 편 공석하의 소설 <핵물리학자 이휘소>(1989)의 출판 금지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공석하와 출판사는 책을 절판시키고 일부 수정을 거쳐 <소설 이휘소>(1993)라는 이름으로 재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미국 유학 시절 이휘소의 지도를 받은 강주상 교수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방송공사(KBS)가 <이휘소의 진실>이라는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강주상은 이듬해 직접 <이휘소 평전>을 펴내어, KBS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종래의 풍설들이 근거가 없음을 조목조목 따져 밝혔다.

그러나 정작 흥미로운 것은 이런 속설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라,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 20년 전부터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황우석 사태의 예에서 보이듯 기회만 만나면 언제든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점이다. 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휘소 신화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가?

이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은 김진명도, 공석하도 아니라는 사실이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휘소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신정권의 핵개발을 연결하는 음모론은 일찍이 이휘소 사망이 국내에 보도된 직후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사고가 일어난 지 딱 2주 지난 6월 30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신민당의 고흥문 의원이 이휘소의 사망에 “어떤 흑막이 개재되어 있지 않느냐”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수두뇌,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두뇌를 늘 정부는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물어보았다. 이것이 이휘소를 둘러싼 음모론 중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사례다. 그 후 문서에 실리지 못한 무수한 소문과 추측들이 떠돌아다녔을 것이고, 공석하와 김진명 등은 10여년 동안 항간을 떠돌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가공해 낸 것일 뿐이다.

고흥문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고, 최형섭도 우수한 인재를 잃어 안타깝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만을 남겼기 때문에 이 음모론의 뿌리를 더 캐고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친위세력도 아닌 야당 의원이 핵무장을 지지하는 맥락에서 실제로는 전공분야도 다른 이휘소의 죽음을 아쉬워했다는 사실은 이휘소 신화가 어떤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

결국 이휘소 신화가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특히 ‘노벨상이 유력한’) 과학자, 나라를 위해 곧바로 응용할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과학자, 나라를 사랑해 명예와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과학자. 이런 영웅적인 과학자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한, 이휘소건 황우석이건 다음의 누구건 ‘존경과 흠모를 불러일으키는’ 영웅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95년의 법원 판결은 어쩌면 ‘국민 정서’를 충실히 대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과학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바람의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따라서 과학 영웅의 서사에 대해 “과학자의 실제 모습은 그것과 다르다”고 사실의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전략이 아니다. 과학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어 냄으로써만 존경과 흠모를 받을 수 있다는 구도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유용성이나 효용과 같은 낱말을 빼고, 대신 즐거움이나 보람 또는 재미 같은 낱말을 넣어 과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지 않을까?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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