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게 찾아온 성장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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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화사 백두대간

(주)영화사 백두대간

제목 윈터 슬립 (Kis uykusu/Winter Sleep)

제작연도 2014년

제작국 터키, 프랑스, 독일

러닝타임 196분

장르 드라마

감독 누리 빌게 제일란

출연 할룩 빌기너, 멜리사 쇠젠, 드멧 아크백

개봉 2015년 5월 7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독특한 영화를 즐기는 팬들 사이에선 터키 영화의 인지도가 꽤 높은 편이다. 판권의 개념이 아직 미비했던 1970년대 터키 영화계는 유명 할리우드 작품들을 복제한 영화들로 돈을 벌었는데, 이들의 표적이 된 작품들은 주로 <슈퍼맨>, <스타 워즈> 같은 블록버스터들이다. 봇물처럼 쏟아진 복제작들은 지금까지도 소위 B급, 또는 망작, 괴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놀림감이다.

하지만 이 정도 오명으로 터키 영화의 수준을 단정한다면 오산이다. 1982년 공개된 일마즈 귀니 감독의 <욜>은 그 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의 완성도도 빼어나지만, 정치범으로 수감 중이던 감독이 탈옥과 망명을 감행해가며 완성했다는 극적인 제작 비화는 작품의 가치를 상승시킨 것은 물론 당시 터키의 사회 실상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욜>은 한국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당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수입금지처분을 받고 묶여 있다가 6년이나 지난 1988년에야 뒤늦게 간판을 걸었다.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터키 영화였다.

터키 영화 100주년을 맞이한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윈터 슬립>은 다시 한 번 터키 영화의 저력을 세계에 드높였다.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기도 한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은 1993년 연출한 첫 단편영화부터 칸 영화제에 초대되며 인연을 맺는다. 이후 현재까지 만든 7편의 작품이 칸에서만 8번이나 수상하며 칸 영화제가 진정 사랑하는 감독이라는 수식까지 얻어낸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군복무 시절에 읽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자서전은 결정적 방아쇠가 됐다. 제일란 감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로베르 브레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잉마르 베리만, 오즈 야스지로 같은 거장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럼없이 밝히는데 그래선지 그의 작품들 속에는 늘 존재와 소통에 관한 고뇌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차분하고 진지한 고찰이 동반된다.

과거 연극배우였지만 은퇴 후 작은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아이딘(할룩 빌기너 분)은 좋은 집안 덕에 남부럽지 않은 환경 속에 살아온 중년남이다. 터키 역사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꿈꾸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역신문에 초라한 칼럼이나 연재하고 있는 그의 시간은 무미건조한 증발일 뿐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평온한 것도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이가 멀어진 미모의 젊은 아내 니할(멜리사 쇠젠 분)은 그와 대면하는 것조차 기피하고, 오래전 이혼한 뒤 더부살이로 살고 있는 여동생 네클라(드멧 아크백 분)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아이딘의 심기를 건드린다. 수많은 영화의 주제로 등장하는 ‘성장’이란 모티브는 청소년기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화 <윈터 슬립>은 중년의 나이에 불현듯 찾아든 삶의 성찰과 그로 인해 맞게 되는 변화와 성장의 눈부신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성찰과 성장이란 이전의 삶을 뛰어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그 고귀한 선물은 불현듯 누구에게나 마법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시지이기도 하다.

터키 영화라는 낯섦도 그렇지만 3시간 16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은 관객들의 선택에 불리한 조건이 될 만하다. 하지만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에서 착안한 이야기는 현실적이며, 유일한 음악으로 등장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서정적이기 그지없다. 서늘한 이국적 풍경 속에 숨 쉬는 낯선 이들의 대화에 귀 기울여보는 것만으로도 어느덧 충분한 치유의 경험이 찾아들 것이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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