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기상 드높인 ‘진달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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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장군총에는 벽화도, 그 어떤 부장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을 천천히 돌아보니 층층이 쌓아올려진 바위틈으로, 천년 세월을 지켜온 이끼가 자라고 있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 꽃 펴 있고, /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 당신은 / 잠이 들었죠. /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려적 장수들이 / 의형제를 묻던, / 거기가 바로 / 그 바위라 하더군요. /(중략)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 꽃 펴 있고, / 바위 그늘 밑엔 / 얼굴 고운 사람 하나 /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 (중략)

말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한 점 구름처럼.

말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한 점 구름처럼.

환도산성서 멀리 보이는 통구하 물줄기
우리 민족의 드높던 기상과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 시구로, 겨레 사랑이 뜨거웠던 민족시인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山川)’이다. 환도산성 아래 옛 고구려적 무덤군을 찾아가며 위대했던 태왕의 신화를 떠올린다. 이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광막한 대지에서 시인이 읊조렸던 ‘옛 고구려적 진달래 산천’은 과연 어디련가.

고구려 유리왕이 국내성의 쌍성으로 쌓아올린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환도산성에 오른다. 산성하무덤군이 발 아래 펼쳐지고 멀리 국내성과 압록으로 흘러드는 통구하의 물줄기가 모두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집안현의 지기는 드넓고도 편안하다. 북쪽으로 장백산맥의 지맥인 노령산맥의 준봉들이 마치 옛 고구려적 장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진을 형성한 듯 도시를 감싸안고 있는데, 위풍당당 북풍을 막아선 위용이 든든하다.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통구(通溝)하의 물길이 역사를 잊은 채 유유히 흐른다.

장군총.

장군총.

옛 고구려의 신화를 간직한 광개토왕비와 태왕의 무덤, 장군총은 이곳 환도산성에서 멀지 않다. 두 무덤은 모두 옛 고구려적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을 알지 못하나 그 거대한 축묘의 규모로 ‘총’이라 불리는 장군총과 조금 떨어져 자리한 광개토왕비와 광개토왕릉까지 둘러볼 셈이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햇빛 맑은 날이면 후고구려적 의형제를 묻던 바로 그 바윗가에 진달래 몇 뿌리 피어나고, 이름 모를 나비가 날아들 것이다. 바람 따뜻한 날이면, 그 바위 그늘 밑에 얼굴 고운 사람 서늘히 잠들어 뼛섬이 썩은 무덤가에 꽃죽이 널려 있을 것이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5.5㎞ 떨어져 있으며, 통구평야 동쪽 용산(龍山) 기슭에 위치한다. 광개토왕릉비는 이 장군총에서 서남쪽 1.3㎞ 지점에 위치하고 다시 500여m 남짓의 거리에 호태왕릉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총을 ‘능’이라 하지 않고 ‘총’이라 하는 이유는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면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인데, 북한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고구려인의 기상이 어린 거대한 장군총을 마주한다.

호태왕릉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릉.

호태왕릉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릉.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 거대한 무덤은 웅장하고도 견고하다. 장군총은 그 위용과 축묘방식으로 광개토왕비 등 집안시의 고구려 유적과 함께 지난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두 1100개의 거대한 암석을 쌓아서 만든 이 무덤은 계단 형식으로 쌓아올린 방단계제식 적석무덤이다. 아래부터 모두 7단의 계단을 쌓아올려 19층으로 축묘되었는데, 그 축묘에 있어 중국의 방식과 다르게 쌓은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이 고구려의 무덤이라 판단되는 근거다. 장군총 돌 하나의 무게는 가벼운 것은 15t, 큰 경우 25t에 이른다. 특히 정상부에 올려진 돌은 무려 50t으로 추정되어진다. 이 돌은 사방을 빙둘러 홈을 파놓은 흔적이 나타나는데,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던 흔적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의 ‘묘상유옥’이란 기록에 근거해 무덤 상단에 가옥 또는 지붕을 올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면에서 가까이 다가서니 무덤 정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무덤칸이라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관을 모셨던 관대가 나타난다. 천장과 벽 사이에 큰 통돌을 쌓아서 무덤칸을 만들고 크고 작은 2개의 관대를 배치했다. 큰 관대는 왕의 관대, 작은 관대는 왕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총을 왕의 무덤이라 추측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군총에는 벽화도, 그 어떤 부장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을 천천히 돌아보니 층층이 쌓아올려진 바위틈으로, 천년 세월을 지켜온 이끼가 자라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세계문화유산 장군총의 거대한 위용
다시 호태왕릉비라 불리는 광개토대왕비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비는 장수왕 2년(414)에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높이 6.39m, 너비는 좁은 쪽은 1.34m, 넓은 쪽은 2m, 무게는 37t에 이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커다란 투명유리로 보호되어지고,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통제되고 있다. 장수왕은 고구려 건국부터 호태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선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커다란 바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비문으로 새겼다. 웅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이러한 방식이 중국의 비석 형식과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당, 수, 한나라의 경우 자연석을 다듬어 문자를 새기고 그 꼭대기에 비액을 만들어 올린다. 하지만 태왕의 비석에는 비액을 세워둔 흔적이 없다.

후손에게 각인된 광개토왕의 위대함
아쉬운 점은 비석의 비문이 고구려의 패망 이후 많이 훼손되면서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19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 발견됐다. 비석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현지의 마을 주민들은 이를 예사롭지 않다며 신성시하였다. 때문에 비석 주위의 잡초와 수목들을 불을 질러 태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비석까지 손상되어 글자가 훼손되었다. 비석의 4면에 새겨진 글자수는 모두 1755자이다. 그 중 판독되어진 글자는 1570여자이다. 나머지 150자는 판독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일부 훼손됐지만 고구려인의 기상과 신화는 더 선명한 가치로 후손에게 각인되어질 것이다. 비석을 돌아보고, 태왕릉이라 불리는 광개토왕릉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능은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우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능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짐작하는 이유는 바로 50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무덤에서 ‘태왕무덤’이라 새겨진 돌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경계로 흐르는 압록강.

북한과 경계로 흐르는 압록강.

고구려인들에게 무덤은 현세적 공간이 아니었다. 천제의 후손이라 믿었던 고구려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분리하지 않았다. 망자의 주검 앞에서는 눈물을 보였으나 장례를 치르는 상례에서는 울지 않고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뜻으로 장수왕은 선왕인 광개토왕의 사후에도 창대한 만년의 꿈을 비문에 새겨 후세에 남겨두었다. 장수왕은 후세가 이 땅과 역사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을까. 고구려와 발해 등 북방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닌 지금의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 우리 스스로 역사인식을 확고히 다질 때, 새로운 민족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말 달리던 옛 고구려적 왕이 백마 탄 형상으로 한 점 구름이 되어 하늘로 솟구친다. 대륙을 말 달리던 고구려 장수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명으로 흩어진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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