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일출을 보며 새해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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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낙산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은 오랜 꿈이던 관음보살을 마주하게 되고, 그 자리에 홍련암을 짓고 원통보전에 관음을 모신다.

이제 갑오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해가 떠오르는 동해 낙산사에 오른다. 의상대사가 벼랑 끝 홍련암에서 마주한 꿈은 무엇이었을까?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따라 오봉산 정상에 오르자 동해 바다로 햇귀가 밝아온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맞을 수 있다는 의상대 일출.

3대가 덕을 쌓아야 맞을 수 있다는 의상대 일출.

꿈의 실현을 보여주는 복원된 사찰
2005년 낙산사는 큰 화재로 도량의 전각들이 꿈처럼 사라졌다. 큰 화마는 인근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불똥 때문이라는 풍문이었다. 믿지 못할 광경 앞에 모든 국민이 울컥 눈물을 삼켰다. 일주문, 홍예문, 원통보전 등 주요 전각 15채가 잿더미로 변하고, 동종(보물 479호)은 완전히 녹아내려 그 모습은 참혹했다. 그나마 온전한 것이라곤 사천왕문과 보타전, 보타락과 홍련암뿐이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고, 사람들은 그만큼의 눈물과 기도로 그 터에 다시 아름답고 웅대한 도량을 세웠다.

어찌 변하였을까? 천년 누겁의 위용과 아름다움은 본래대로 갖추어진 것일까? 새로이 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공덕과 정성이 쌓여졌다고 했다. 온전한 복원을 위해 1778년 당시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명으로 그린 ‘낙산사도’(洛山寺圖)를 밑그림 삼고 가람의 배치와 조화로움을 기본으로 하여 다시 절을 세웠다. 낙산사의 복원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만 같은 것이어서, 다시 지어진 불사는 그 자체로 꿈의 실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이르자 바로 낙산사로 오르는 입구이다. 주차장에 주말 관광객들과 관광버스들이 빼곡하다. 알록달록 등산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오르는 초입에 ‘꿈이 시작되는 길’이란 푯말이 나타나고, 몇 걸음 오르자 키가 훌쩍 큰 송림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솔숲 사이로 소나무들은 기세등등하고 기백이 넘치고, 짙은 솔향은 마음의 일렁임을 다잡아준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인 낙산사 홍련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인 낙산사 홍련암.

양양 낙산사는 잘 알려진 대로 신라 의상대사(義湘·625~702)가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신라 경주에서 이곳에 온 의상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 지금의 홍련암 부근에서 파랑새를 만났고, 그 파랑새가 몸을 숨긴 석굴로 들어7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윽고 7일 후 붉은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위로 관음보살이 현신한다. 의상은 그 파랑새를 쫓아가 오랜 꿈이던 관음보살을 마주하게 되고, 그 자리에 홍련암을 짓고 원통보전에 관음을 모신다. 의상은 이 원통보전에 석가모니불이 아닌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인도의 ‘보타낙가산’을 본떠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 경내로 들기 위해 홍예문(虹霓門)을 지난다. 홍예문은 조선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을 중수하며 세운 석문(石門)이다. 당시 강원도를 이루던 26개 고을에서 돌을 하나씩 내놓아 축을 쌓았다. 화강석으로 문 위까지 돌을 쌓고 좌우로 성벽을 쌓았는데, 안팎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출입문이다. 팔작지붕의 누각 저편으로 떨어지는 일몰이 특히 아름다워 발길을 멈추게 한다.

홍예문 앞에는 예전 임금에게 진상하던 낙산 배의 시조목이 남아 있다. 잠시 살핀 후, 동종이 걸린 범종루를 지나 사천왕문, 빈일루, 응향각을 차례로 지나니 중심 법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에 오른다. 의상대사가 홍련암 굴 속에서 관음보살로부터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받으면서, “산 위로 수백 걸음을 오르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법당을 세운 것이 바로 원통보전이다. 앞마당에는 수정염주와 여의보주, 2006년 공중사리탑 보수 과정에서 출토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7층 석탑(보물 제499호)이 자리하고 있다. 또 법당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이다. 원통보전은 그 웅장한 미와 솟구치는 탑의 기백이 어우러져 당당하고, 에워싸고 있는 담장 역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양양 낙산사 오봉산 정상의 해수관음상.

양양 낙산사 오봉산 정상의 해수관음상.

관음보살 계시를 받고 세운 원통보전
일출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서두른다. 의상대를 거쳐 북쪽 절벽에 위태롭게 자리한 홍련암까지 올라 ‘파랑새’를 찾아보고, 해수관음보살의 미소 또한 마주하고 싶다. 오봉산 정상부에 오르니, 아직 햇귀가 차오르지 않은 먼 바다를 해수관음상이 홀로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불혹을 훌쩍 지나서야 의상이 찾아 헤매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의상이 파랑새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그저 풍문이었으며, 파랑새는 그가 그리던 꿈의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었을 의상대에 올라 광막한 동해의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동해의 새벽바다로 작은 어선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홍련암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서서히 어둠을 거두고 햇귀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홍련암에 이르는 길은 오른편으로 바다가 탁 트여 바람이 정신을 맑게 한다. 홍련암은 거의 해안 단애의 끝자리에 간신히 몸을 앉힌 모습이다. 이 작은 도량에서 어머니 몇몇이 엎드려 오직 간절함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다. 벼랑 끝 바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늘 자식 걱정만 하는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어머니들의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려 법당에 들어 법당 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고개를 파묻고 파도치는 바다를 본다.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짐은 신기한 일이다. ‘다시 풍랑이 잦아들고 해가 떠오르겠지.’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위안을 얻는 듯 평안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일상적 시공간에서의 탈출은 그 자체로 위안이며 정화와 치유의 마력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홍련암에서 내려오며 처마 끝에 매달린 금빛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던가? 바람에 흔들리던 풍경은 마치 거침없이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먼 바다로, 자유로 나아가는 듯했다. 마치 의상이 파랑새를 본 것처럼.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주말을 맞아 낙산사를 찾은 관광객들.

주말을 맞아 낙산사를 찾은 관광객들.

벼랑 끝 바위,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
본래 낙산사 홍련암은 3대 관음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수많은 불자들과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성지이다. 특히 다른 사찰에 비해 비교적 가벼이 오를 수 있어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상시적으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에도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최근 선보이고 있는 템플스테이 시즌2의 패밀리브랜드인 ‘아생여당’을 운영하는 사찰이다. 그 중 낙산사는 ‘당당(堂堂)’한 ‘꿈’을 테마로 한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연말연시 특별한 시간을 갖고자 하는 가족과 학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프로그램은 사찰탐방, 꿈길 따라 걷기, 스님과의 차담, 희망의 씨앗 품기(일출), 해수관음상요불(명상, 108배), 새벽예불, 명상 등으로 이루어진다.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운영되며 별도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동해 바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의상대 일출은 동해의 일출로 손꼽힌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길에서 만난 사람>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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