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뿌리, 선비고을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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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순흥의 역사는 백운동 서원이 기개와 절개의 터에 세워지면서 다시 살아난다. 이후 영주 사람들은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참된 선비 고을의 명맥을 연연히 이어오고 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영주의 가을은 선비고을이란 이름에 걸맞게 운치가 깊고도 점잖은 기품이 스며 있다. 참 선비의 정신으로 이름 높던 영주의 옛 이름은 순흥이다.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순흥의 역사는 조선조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만다. 옷깃을 여미고 오래도록 잊혀졌던 옛 고을을 찾아간다. 한 걸음은 선현의 뜻을 따라, 또 한 걸음은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고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른다.

선비촌 입구에 세워진 선비상이 영주가 선비고을임을 말해주고 있다.

선비촌 입구에 세워진 선비상이 영주가 선비고을임을 말해주고 있다.

사라진 옛 지명 ‘순흥’ 비운의 운명
선비 고을 영주의 뿌리에는 서원이 자리한다. 서원은 절개와 기개로 푸르렀던 성현들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먼저 소수서원으로 길을 잡는다. 소수서원은 영주 순흥면(順興面)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 때의 유명한 유학자인 안향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묘를 세우고, 백운동 서원을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매표소를 지나 영주가 고향이라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숲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바로 한국 성리학의 시발점입니다. 영주를 예전에는 순흥이라 하였습니다. 순흥은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입니다. 일반적으로 대개의 서원에서는 공자를 모시나, 소수서원은 공자 대신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모십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 서원을 세울 당시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敬)’자를 바위에 새겨 선생에 대한 예를 다합니다. 입구 오른편의 돌다리를 건너서면 취한대 아래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그 위에 흰 글씨로 백운동(白雲洞)이라는 이 골짜기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선비고을 영주의 무르익은 가을풍경이 아름답다.

선비고을 영주의 무르익은 가을풍경이 아름답다.

현재의 이 터는 본래 조선 세조 때까지 숙수사가 있던 자리이다.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는 안향 선생이 어린 시절 홀로 독학하며 학업에 매진하던 절이었다. 하지만 숙수사는 조선 세조 3년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면서 불에 태워져 폐사되고 만다. 소위 ‘정축지변’(丁丑之變·1456)이다. 그만큼 순흥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선비의 고장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그 위세가 당당했다. 당시 순흥도호부는 영월·단양·봉화·안동·예천의 일부까지 그 행정권이 미쳤다고 할 만큼 이 지역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정축지변 이후 이곳 순흥 일대는 세조에 의해 피바다를 이루고 ‘순흥’이란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세조가 순흥의 역사를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후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풍기 군수 주세붕이 다시 이곳 숙수사 터에 백운동이란 이름으로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소수서원과 이어진 선비고을 영주의 선비촌.

소수서원과 이어진 선비고을 영주의 선비촌.

선비 고을의 명맥 이어온 소수서원
조선조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순흥의 역사는 백운동 서원이 기개와 절개의 터에 세워지면서 다시 살아난다. 이후 영주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라질 당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올곧은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뿌리로 참된 선비 고을의 명맥을 연연히 이어온 것이다.

매표소 출입구를 지나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좌우를 호위하듯 하늘로 솟구쳐 있다.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 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숲을 이룬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 선비의 의미를 담아 ‘세한송 학자수’라고 불린다. 오른편으로 당간지주 한 기가 눈에 띈다. 바로 옛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이다. 이 당간지주는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인근의 승림사와 함께 불태워져 ‘당간지주’만 남게 된 것이다.

“소수서원은 바로 동방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이룬 곳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 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그래서 명종 5년(1550년) 임금이 서적·노비·토지와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친히 내립니다.”

‘소수’(紹修)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닦게 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무너진 주자의 성리학을 다시 이으려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제학 신광한이 짓고, 명종이 직접 친필로 현판에 써서 내렸다고 전해진다. 현재 소수서원 뒤편에 자리한 소수서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취한대.

취한대.

조선시대 인재 배출의 요람
이후 소수서원은 임금이 이름을 내린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수백년에 걸쳐 4000명이 넘는 유생들과 명현거유를 배출하는 조선조 학문 탐구의 산실이 된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학 강의실이다. 유생들이 기거하던 학구재, 소수서원의 원장과 교수 등이 함께 기거하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와 일신재, 지금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장서각 등을 천천히 둘러본다.

“당시 영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선비들은 자손들을 이곳 소수서원에 보냈습니다. 소수서원은 일종의 사립대학에 해당합니다. 명실공히 조선시대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죠. 당시 서원은 선례후학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선례는 제향의 기능이고, 후학은 말 그대로 학문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먼저 선현을 예로 받들고 학업으로 바르게 하자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보다 93년이 앞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인재를 길러내던  소수서원은 하버드대보다 93년 앞선 대학이다.

조선의 인재를 길러내던 소수서원은 하버드대보다 93년 앞선 대학이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니 숲속에 들어앉은 서원의 품새가 위풍당당하고 기백이 넘친다. 간간이 스승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인 지락재와 소수박물관을 둘러본다. 지락재는 ‘지극한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 없고, 지극한 삶의 요체는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 없다’에서 따온 말이다. 그 뒤편에 자리한 소수박물관에는 백운동서원의 현판, 창건자인 주세붕의 초상(보물 제717호), 고려시대부터 주자학의 기초를 닦은 회헌 안향의 초상(국보 제111호) 등이 전시되어 있어 창건 당시부터의 서원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서원을 끼고 돌아나는 죽계천과 선비들이 휴식을 취하던 취한대를 멀찍이 바라본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풍류를 즐기던 옛 선조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어느덧 해가 질 무렵, 어둑해진 저녁 하늘에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다. 조선 400년간 4000여명의 인재를 양성해 명실상부한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던 소수서원. 장서각 앞자리의 정료대에 관솔불이 밝혀지니 죽계천으로 보름달이 잠기고 소리 높여 글 읽는 유생들의 목소리가 낭랑하고도 유려하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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