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바다로 간 산적-지적재산에 대한 약탈 행위 ‘해적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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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니, 나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해적이 되었소.” 여자 해적 여월이 바다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한다. “왜 해적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산적 장사정이 화답한다. “나도 소중한 사람을 위해 바다로 가겠소.”

이석훈 감독의 영화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은 바다 이야기다. 이석훈 감독은 고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다가 해적을 그렸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그랑부르> 그리고 <모비딕>이 동시에 떠오른다.

영화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는 그날부터 시작한다. 회군을 반대한 장사정은 산으로 숨어들어가 산적이 된다. 바다에서는 해적이 출몰한다. 고려 말, 조선 초 민심은 이렇게 흉흉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성계는 국호와 국새가 필요하다. 사신이 명나라에서 국호 조선과 국새를 받아오는 길에 귀신고래의 습격을 당한다. 귀신고래는 국새를 꿀꺽 삼켜버렸다. 이성계는 진노한다. 전군을 동원해 보름 안에 국새를 찾아오라고 명한다. 관군이 나선다. 해적을 이용해 고래를 잡기로 한다. 관군의 배는 풍랑에는 강하나 속도가 느려 고래를 잡기 어렵다. 산적들도 끼어든다. 옛 해적 우두머리 소마가 여자 해적 두목 여월을 공격한다. 바다 위가 난장판이 된다.

[영화 속 경제]해적 : 바다로 간 산적-지적재산에 대한 약탈 행위 ‘해적판’

서양의 경우 해적은 비교적 좋은 이미지다. 모험, 자유, 혁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구에 원체 시달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왜구는 후삼국시대 때부터 출몰했다. 고려와 조선은 왜구의 노략질에 골머리를 앓았다. 명청 교체기 때는 명나라 유민들이 해적질에 가담했다. 한반도의 해적도 있었다. 신라구(新羅寇)다. 후삼국시대 신라 유민들로 일본 규슈와 쓰시마 등을 약탈했다.

때문에 해적은 약탈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법으로 복사해 판매하거나 유통되는 책, 테이프, 소프트웨어, 영상물 등을 ‘해적판’(pirated edition)이라 부른다. 지적재산을 약탈하는 것이 해적 행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해적판의 역사는 깊다.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가 미국에서 불법 유통되자 1842년 미국을 직접 방문해 저작권 보호를 호소했다.

세계저작권협약은 1952년에 가서야 비로소 맺어진다. 외국의 저작을 발행할 때에는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발행 허가를 얻고 규정된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의 협약이다.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 7월에야 협약에 가입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해적판의 천국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홍콩 느와르 및 무협 영화 등이 마구 복제돼 판매됐다. 대학가에서는 원서를 복사해 교재로 쓰는 일이 흔했다. 특히 최신 개봉작 복사판이 음성적으로 많이 나돌아 때때로 큰 사회적 논란을 낳기도 한다. 미국은 한동안 한국을 ‘지적재산권 침해 감시국’으로 지정했다.

최근에도 미국 드라마인 ‘미드’와 일본 애니메이션 해적판이 국내에서 많이 유통돼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방송국 6곳은 미드 자막을 만들어 배포한 번역가들을 집단 고소했다. 일본 정부와 대형 출판사 30곳도 한국, 중국, 스페인 등에 기반을 둔 인터넷 사이트 300여 운영자에게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 삭제를 요구했다.

한류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요즘은 한국도 해적판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중국, 미국 LA 등에서 유포되는 한국 드라마와 음악의 상당수가 저작권 사용료를 내지 않는 해적판들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한국은 해적판을 다소 묵인하는 분위기다. 해적판 확산을 기술적으로 막기도 어렵거니와 이제 막 한류가 전파되는 시점에서는 한류 확산을 되레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적판을 ‘공짜 마케팅’으로 역이용하자는 발상이다. 해적을 이용해 고래를 잡자는 관군의 발상과 같다고나 해야 할까.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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