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 “100년을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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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한때 다방면에 걸쳐 맹활약을 하던 대중적 스타였다. 명지대 교수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라는 타이틀을 필두로 베스트셀러 저자로, 방송 진행자로, 최고 강연료로 모셔야 하는 명강사로 명성을 떨쳤고, 급기야 CF 모델까지 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는 이 모든 직함을 서울에 두고 2년 전 홀연 일본 교토의 미술대 학생으로 변신했다. 그 이후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국내 최초로 ‘휴테크’란 개념을 제안하며 ‘잘 놀아야 성공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책을 통해 중년남성들의 심리를 꿰뚫은 그는 정말 잘 놀고 있을까. 

50세에 그 아까운 교수직을 내려놓고, 그 많은 강연료를 뒤로 하고 떠난 그에게 ‘안녕하게 사는 법’을 듣고 싶어 모처럼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 “100년을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요즘 안녕한가.
“매우 안녕하다.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 우선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혼자 우아하고 고상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장을 봐서 미리 그릇에 담아둔 샐러드, 빵과 직접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해서 내린 커피를 클래식을 들으며 먹고 마신다. 8시에 일어학원에 가서 일어공부하고, 학교로 돌아와 학생식당에서 300엔(3000원 정도)짜리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그림수업을 받으며 6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현재 교토 사가현 예술전문 단기대학생이다. 일본화 전공이다. 만화를 전공하려 했으나 영어가 가능한 교수가 일본화 교수밖에 없어 일본화를 배우고 있다. 뜻밖에 내가 너무 일본화를 잘 그려 교수도 감탄한다. 

저녁에는 돌아와 책 번역하고 다른 책도 읽는다. 내가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 싶으면 칭찬해주려고 목욕탕에 가서 온천도 하고, 맥주도 마신다. 밤에 쓸쓸하면 가족과 통화하고 카톡에 올려진 사람들의 사진을 본다. 2012년 1월 3일에 큰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나는 5일 교토에 왔다. 그 사이 아들은 제대했고 난 계속 학생이다.”

50세에 가장이 직장, 그것도 65세 정년이 보장된 교수를 그만두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존경하는 이어령 선생이 인생에서 정점을 찍지 말라고 했다. 정점에선 내려올 일만 있기 때문이다. 50세 무렵에 난 정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안정된 교수직, 하루에 수십 군데에서 오는 강의 요청, 수십만권이 팔린 책들, 아이돌처럼 밴을 타고 다니고 기사와 비서도 있었다. 바쁘다면 헬기를 보낼 테니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많았고, 방송 제의나 정치권의 유혹도 많았다. 그러다 이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점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후회는 없나.
“내가 가장 잘한 결정이 교수직 그만둔 것과 그림을 시작한 것이다. 상황에 밀려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교수 체질이 아닌데 억지로 하던 교수직을 그만두니 행복하다. 학생들에게 강의는 해도 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은 부족했다. 그림 역시 내가 어떤 대상에 이렇게 몰두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재미있다.

말과 글 등 자기표현의 수단이 많은데, 말과 글은 나중에 후회하거나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때가 많다. 그림은 가장 후회 없는 자기성찰의 수단이다. 논리적 성찰은 아니지만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만년에는 전공에 관계없이 다들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만년도 아닌 나이에 그림을 그려 뭐할 건가.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이걸 어떻게 어디에 써먹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시작해서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거나 공부를 할 때 늘 그 결과, 활용도를 궁리했는데 그림에 대해서는 결과물에 대한 강박이 없다.

원래는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의 성을 다루는 ‘에로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만화 대신에 일본화를 배우는 중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말 잘 그린다. 앞으로 글로만 표현되지 않는 또 하나의 영역을 그림과 같이 담아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기는 하다.”

50세에 훌쩍 떠나 많은 중년남성들이 부러워한다. 물론 김정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도 하지만….
“‘당신이니까 가능하다’는 말은 불쾌하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호모헌드레드, 100세인의 삶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다. 45~60세를 신중년으로 칭할 만큼 생애주기도 달라졌다. 학교로 치면 학제가 개편된 셈이다. 그렇다면 각각 삶의 과정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일부일처제도 고민할 문제다. 25세에 결혼한 한 배우자와 75년을 계속 사는 게 행복일까. 내 아들에게도 가능한 한 늦게 결혼하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100년 동안 사용할 에너지를 50년 만에 다 쓰는 셈이다. 지난 총선 때 정치권의 유혹이 많았다. 정치를 하면 굉장히 폼나게 잘할 자신도 있고, 

그런 제안을 받으니 갑자기 역사와 민족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그런데 가족과 상의하니 아들이 ‘아빠가 정치하면 정말 잘할 것 같지만 분명히 일찍 죽을 거예요’라고 했다. 정치하며 받을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정치만 하기엔 내가 너무 다른 능력이 많다. 국가적 낭비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 “100년을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정치를 안 해도 우리 국민들, 특히 남성들은 모이면 다들 정치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은 진정한 나라 걱정이나 덕담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건 일단 한국 사회의 기본 정서가 집단불안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발전방향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한국 사회에서 불안은 아주 다양한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사안이 ‘보수 꼴통’과 ‘좌빨’로 아주 간단히 나뉘는,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도 집단불안에서 출발한다. 불안할수록 적을 분명히 하면 내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확실한 한 명의 적을 만들어놓고 그를 욕하면서 자기위안을 삼는다. 집단불안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국제통화기금 사태부터다. 그 전까지는 불안할 여지조차 없었다. 우선 가난을 극복해야 했고,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민주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우선이었다. 좀 생활의 여유도 생기고 민주화의 바람이 부니까 불안해지고, 그걸 정치혐오로 표현하는 것이다.”

집단불안의 해결이나 치유책은 없나.
“정치공학적이나 사회구조적 문제는 논외로 하고, 각각 개인의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 일단 나를 위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나도 일본에 처음 와서 6개월 동안 너무 외로웠다. 럭셔리한 밴을 타고 하루에 7~8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갑자기 아줌마들이 타는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300엔짜리 도시락을 먹는 생활을 하니…. 그런데 내 시간이 많아지니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다.

인생 100세란 말도 나 혼자 내 인생과 내 문제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으니 뇟속 깊이 이해된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많다는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상식이 없어서다. 내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상식이 내것이 된다. 

매일 뼈빠지게 회사에서 시달리고 밤마다 술마시고 남 욕하는 등 삶 자체가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데 태도가 어떻게 상식적이 되나. 상식적 사고는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식적 의문을 가질 때 나온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 차분히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왜 바쁜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주말에 나와 별로 가깝지도 않은 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등에 길이 막히는데도 부지런히 다니는 이유가 뭔가. 정직하게 말하면 내 자식 결혼식이나 내 장례식에 그들이 와주길 기대해서다. 

그럼 내 자식의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르고 내 장례식도 소리 없이 치르면 되지 않나. 그런 것들이 행복의 본질과 무슨 연관이 있나. 불편한 것을 쳐내면 내 시간이 많아진다. 내 시간이 많아지면 상식적이 되고, 상식적이 되면 주변에도 관대하게 된다. 쫓기니까 공격적이 되고, 바쁘니까 짜증이 나고 몰상식해지는 거다.”

10년 전부터 잘 놀아야 성공한다, 그게 주체적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념에 변함이 없나.
“그렇다. 주체적 삶의 조건은 지속가능한 삶이다. 지속가능한 경영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다. 그 원동력은 삶의 재미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일본 가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같은 인간들’을 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남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 자연히 주변사람들과도 즐거움을 나누고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정치인 비판하거나 사회구조를 지적하기 전에 더 근원적인 질문,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던져야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고 지속적으로 행복하려면 삶의 매 순간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5일제 시행 후에 휴식과 여가에 대한 필요성을 알게 되고, 나와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정작 시간이 나도 자기 시간을 엉뚱한 데 쓰지 않나. 얼마 전 자료를 보니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다는 악플러의 60%가 중년남성들이라고 해 놀랐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어젠다가 얼마나 다양한가로 측정된다. 미국과 유럽 신문의 주말판을 보면 안다. 정원 가꾸기를 비롯한 각종 취미, 문화공연 행사 안내와 평들, 정치가 아닌 사회·문화분야의 에세이 등 두툼한 뭉치의 주말판 신문을 읽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그걸 주제로 대화를 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남의 이야기에 악플을 달 시간이 있나.”

대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52세다. 나이를 의식하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성욕이 약해졌다. 톨스토이가 나이 들어서 가장 좋은 것이 성욕이 사라진 것이라는 말을 예전엔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 섹스 대신에 다른 것에 관심이 확장된다. 그림, 디자인 등등…. 나이 들어 시력이 약해지고 성욕이 감퇴되는 등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문화에 눈을 돌리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 나이 또래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삶의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100세까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물론 젊은 여자들이 나를 더 이상 남성으로 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청마의 해인데 새해 계획이나 독자들에게 줄 덕담은.
“말의 해라고 마구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난 100세 시대답게 인생의 계획도 1년 주기로 짜지 않고 5년 주기로 짜고 있다. 앞으로 3년간은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예정이다. 또 5년 정도 시간을 갖고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근대 미적 감각의 변화. 인상파 이후의 미술과 산업이 만나는 다양한 접점에 대한 연구를 문헌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보고 느끼고 글로 쓸 계획이다.”

“지난밤에 만난 사람들에게 너무 내 자랑을 해서 오늘 아침에 후회했다”는 김정운 박사. 이렇게 잘난 척을 해도 그가 밉지 않은 이유는 그는 수시로 자기성찰과 반성을 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교수생활을 할 때 내려갔던 입꼬리가 많이 올라간 것만 봐도 그는 진짜 행복한 것 같다. 아, 나도 사표를 쓰면 내 입꼬리가 올라가질까….

<글 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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