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보다 더 함축적인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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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꼴라쥬

무비꼴라쥬

제목 일대종사

영제 The Grandmaster

제작연도 2013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 장첸

러닝타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 2013년 8월 22일

왕가위의 영화에 청춘을 저당잡혔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의 영화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과거의 어느 순간을 끊임없이 복기하게 만든다. 나아가 감금시켜 버린다. 그것은 아련하고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퇴행이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피로감도 쌓여갔다. <아비정전>의, 혹은 <화양연화>의 어느 장면들마다 박제처럼 스며들어있는 나의 청춘과 결별하기 위해, 어쩌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었는지 모르겠다.

<일대종사>에 대한 기대치는 없었다. 여전히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달랐다. <일대종사>는 황혼의 낭만으로부터 벗어나 앞을 향해 큰 보폭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기존의 왕가위 영화가 씻을 수 없는 결핍과 후회를 안고 끝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의 쓸쓸함을 논했다면, <일대종사>는 그 부질없음 조차 마음에 남겨두지 않고 내 손을 떠나버린 모든 것을 담담하게 내려놓을 줄 아는 자의 거대한 무게감을 펼쳐놓는다. 엽문의 도장깨기 같은 것을 원한 관객이라면 아쉬운 일이다. <일대종사>에서 엽문이라는 실존 인물의 자취는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엽위신의 <엽문> 이전까지 그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중국영화에 민족주의 서사가 과거 어느 때보다 힘을 얻으면서 황비홍에 이어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캐릭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도 영화 속에서 민족주의 투사에 항일 운동가와 같은 이미지까지 덮어씌워졌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일대종사>는 <엽문>이나 그 프랜차이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청 덕종부터 부의 황제, 신해혁명, 중화민국, 북벌전쟁, 항일투쟁, 내전, 그리고 홍콩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을 고스란히 통과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지킬 수 있었던 어느 개인의 철학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일대종사>에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인물들의 움직임이다. 과거 왕가위 영화에서 ‘침묵’이 담당했던 서사의 기능이, <일대종사>에서는 ‘몸짓’으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에서 엽문이나 일선천의 동작이 실제 영춘권과 팔극권의 고증에 얼마나 충실했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사소한 손짓이나 동작의 전개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속내와 진심이 수백 개의 대사와 독백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엽문과 궁이의 대결 시퀀스다. 엽문은 궁가의 64수를 드디어 확인하게 된다. 땅에서 허공에서, 엽문과 궁이는 엉키고 따로 떨어지길 반복하며 무를 겨룬다. 그것은 남방과 북방의 무술이 격돌하는 대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음에 품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일은 대결의 승패를 결정지은 마지막 합에서 초래된다. 궁이는 “잎사귀 밑에 꽃을 한 차례 숨겼고, 꿈 속에서 눈을 몇 차례 밟았다”는 말로 미처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설명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궁가 64수라는 상징을 통해 설명된다. 그것은 기약없는 밀당의 이름이기도, 아름답게 빛났던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이기도 하다. 더불어 과거 왕가위 영화들을 관통해온 일관된 정서의 집약이기도 하다. 엽문은 언젠가 다시 한 번 궁가 64수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끝내 궁가 64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궁이조차 궁가 64수를 잊어버린다. 그런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과거의 큰 인연이란 결국 궁가 64수와 같다. 그것을 추억하거나 후회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시 되돌리거나 돌이킬 수는 없다.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을 반복할 수도 없다.

궁이는 과거에 유폐되는 쪽을 택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꽃이 지듯 사그라든다. 엽문은 그녀의 마음 또한 자신과 같았음을 뒤늦게 확인하지만 부질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오래된 유적지를 찾아가 어느 벌어진 틈 안으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하여, 결핍에 대하여, 궁가 64수에 대하여 토로하지 않는다. 대신 “인생은 이미 둔 바둑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를 향한 마음도, 궁이와 궁가 64수라는 이름의 아련함도, 그는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앞만 보고” 갔다. 나는 그것이 엽문의 입을 빌어 말하는 왕가위의 선언과 같이 들렸다. 왕가위는 현명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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