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온 편지, 설렘과 두려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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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낭만파 남편의 편지
원작 안정효, <낭만파 남편의 편지>

감독 최위안

출연 김재만, 신소현, 윤인영

개봉 2013년 9월 12일

러닝타임 97분

등급 18세 이상 관람가

42.9㎡. 13평이다. 13평짜리 지하 연극무대가 영화의 공간이다. 남자는 테헤란로의 회사로 출근을 하고 여자는 동네에서 시장을 본다. 남자는 편지를 쓰고 여자는 그 편지를 읽는다. 영화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안정효의 동명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소설 속 문장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디지털이 완승한 시대, 아날로그의 감성. 무슨 소리인가 했다.

사실 영화는 단조롭다. 형식 실험이다. 배우들은 마치 거기에 문이나 지하철이 있는 것처럼 마임 연기를 한다. 양복 윗주머니에서 지하철 손잡이를 꺼내 한 손으로 들고 흔들리는 지하철에 타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한다. 라스 폰 트리에가 <도그빌>에서 한 번 선보인 것이다. <도그빌>은 그래도 거대한 체육관 안에 흰색 테이프로 경계를 구획해 <도그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곳은 13평짜리 작은 연극무대다.

7살짜리 딸을 둔 부부. 결혼 9년차다. 권태기다. 말 그대로 낭만파 남편은 손글씨로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금란씨, 저랑 두 번째 결혼을 해보시지 않으렵니까?” 발신자는 ‘영원한 당신의 남자’다. 모호한 텍스트다. 영화 속 남편은 이름조차 없다. 직접 전했다면, 아내로서는 발신자의 ‘의도’를 헷갈릴 이유가 없다. 

편지를 받아든 여자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엊그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수아네 외삼촌일까.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유부남? 지금까지 자신의 연애경험에서 남편은 세 번째 남자다. 미지의 네 번째 남자로부터의 프로포즈다. 그것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다. 구원인 동시에 타락이다. 화들짝 놀란 아내는 자신이 받은 첫 번째 편지를 태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후회한다.

남편이 쓴 두 번째 편지 역시 텍스트는 모호하다. “사랑하는 금란씨에게. 금란씨가 결혼한 지도 10년, 부부가 평생을 함께 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도 금란씨를 사랑합니다. 권태에 찌들어도 고운 그대의 얼굴을 사랑하고…(중략)…가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그대의 고독까지 사랑합니다. 저와 두 번째 결혼을 생각해보고 계시는지요.” 편지에 대한 오독은 확대 재생산된다. 그 ‘네 번째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말하자면 전시안(all-seeing eye)과 같은 존재다.

아내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혹시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던 남편은 두 번째 편지를 보낸 뒤에야 상황을 알아차린다. 첫 번째 편지에서 그 ‘영원한 남자’가 자신이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동시에 유혹이다. 아내의 그 환상을 끝까지 밀고 간다면? 이쯤 되면 영화의 원작소설이 곱씹고자 하는 주제는 대부분 알아차렸을 것이다. 

데카르트를 뒤집은 라캉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욕망의 결핍이론이다.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라는 명의의 마지막 편지에서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것을 제의한다. 약속 시간 1시간 전, 아내는 그곳에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 “다시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하기 위해 나갈 결심을 한다.

재미난 스토리다. 13평짜리 지하 연극무대는 ‘욕망의 끝없이 충족되지 않는 유예’와 ‘사유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함’을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고 감독은 해석한 것 같다. 대중적인 영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조롭다. 시사가 진행되던 극장에서, 잠시 조용해진 틈에 누군가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독에 따르면 영화에 대한 구상을 처음 한 것은 5년 전이다. 선뜻 투자를 약속하는 사람이 없어 감독은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도 돈에 연연하지 않고 흥행 여부와는 별도로 좋은 문학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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