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으로 만들어낸 인간관계의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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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픽쳐스

㈜누리픽쳐스

제목 마스터

영제 The Master

제작연도 2012년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호아킨 피닉스_프레디 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_랭케스터,
에이미 애덤스_매리 수 도드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개봉일 2013년 7월 11일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더 마스터>는 관객 입장에서 애매한 영화일 수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의 성장도, 퇴보도 끝내 목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올려보면 우리 삶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지 않던가. 광각 렌즈로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의 삶이란 희극으로 시작해서 부조리극으로 옮아가는 반복된 촌극에 불과할 것이다.

전작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압도되었던 관객들 또한 <더 마스터>에 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폭발하는 듯한 공기와 비교할 때 <더 마스터>는 언뜻 자의식에 갇힌 이야기처럼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두해야 할 것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아버지 세대의 파멸을 그린 영화였다. 반면 <더 마스터>는 끝임없이 자기 뿌리와 화해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성장하지 못하고 유아적인 상태에 머무른 채 침몰을 거듭하는 아들 세대의 이야기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자본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리스 비극이었다면, <더 마스터>는 부모 세대와의 관계에는 실패했으나 무의식적으로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하려 안달이 난 사람들의 현재 진행형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하려 안달이 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특히 우리 세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건 우리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주인공 프레디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방황을 계속한다. 그는 불법으로 독주를 제조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있다. 역시나 취해있던 어느 날 밤, 프레디는 파티가 한창인 유람선에 무단으로 승선해 난동을 부리다 정신을 잃는다. 다음 날 의식을 찾은 프레디는 ‘마스터’ 랭케스터를 만난다. 랭케스터는 특유의 질문 요법인 ‘코즈웨이 프로세싱’을 통해 피상담자의 전생을 읽고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구루. 두 사람은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게 급격하게 빠져든다. 프레디는 랭케스터의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주인공 프레디는 결핍된 인간이다.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인간 프레디는, 여성기에 집착하며 섹스에 관련해 위악적으로 행동하지만 사실은 관계 자체를 갈구하는 퇴행적인 형태의 유아에 가깝다. 그의 구부정한 등과 걸음걸이 또한 당장이라도 기어들어갈 자궁을 찾아 헤메는 듯 위태롭고 애처로워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술 때문에 죽었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대단히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이 당신을 구원해주리라 믿는가”라는 질문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대답하듯, 종교의 절대자와 같이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정 가치관에 맘 편히 의탁할 생각도 없다.

그래서 그가 찾아 해메는 건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대체된 아버지다.

결국 프레디는 랭케스터와의 관계로부터 유사 부자관계를 추구한다. 자연히 랭케스터의 아내인 매리가 대체된 어머니로서 기능할 것 같지만, 그와 같은 바램은 매리의 태도에 의해 봉쇄된다. 매리의 시각에서 볼 때 프레디는 연적이기 때문이다. 프레디에게 있어 대체된 어머니이자 유일한 ‘여성’은 도리스 뿐이다. 프레디가 꿈꾸었던 대체된 부모와의 관계는 말미에 이르러 ‘파괴된’다. 결핍으로 만들어낸 관계는 신화를 만들고, 신화화된 대상은 반드시 어느 순간 그 스스로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이들의 관계는 애초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실망하고 다시 반복했 듯, 프레디는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전작들과 비교하더라도 <더 마스터>에서 유독 자주 반복되는 데칼코마니 형태의 대칭 샷들을 눈여겨 볼 이유가 있다(포스터를 포함하여). 이는 프레디가 다른 인물들을 자기 결핍에 의해 만들어낸 거울 반대편 이미지로 인식하는 태도와 맞물리는 데, 결국 그렇게 투영된 상은 결코 본질일 수 없다는 한계 또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절대자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다, 는 대답의 가벼움은 필요하다, 는 대답의 무거움을 이길 수 있는가. 견고하고 압도적이며 풍요로운, 더불어 이 또한 거울에 투영된 자기 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 더할 수 없이 슬픈 영화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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