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차별하는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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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남성 중심적·우월적 사고를 드러내는 사례가 여전히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초등 실과 교과서에는 가사·양육 장면에 여성 사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생활의 길잡이’는 단원마다 위인의 업적이나 일화를 소개하는데 ‘자긍심-스티븐 호킹, 꿈-히딩크, 책임-한준호 준위, 용기-처칠, 공정-맹사성’ 등 남성에 편중돼 있었다. 인권위는 “아동에게 가사와 양육은 여성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하거나 여성과 남성의 일을 구분짓게 해 향후 성차별 인식을 갖게 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경향신문 2011년 8월 23일자, 인권위 ‘교과서 속 인권차별 여전’)

1963년 7월 군부대를 방문한 여고생들이 세탁과 바느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자료

1963년 7월 군부대를 방문한 여고생들이 세탁과 바느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자료

인권차별은 여전한데, 이 중 성차별은 오래된 내력이 있다. 1948년 3월 28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여권옹호좌담회’ 기사가 실렸다. 소제목은 ‘축첩행위는 혼인모독 저열한 남존여비사상의 추태’ ‘축첩생활은 간음과 죄악’이었다. 사회자는 좌담 말미에 대안을 제시했는데, “남자중학교나 여자중학교를 물론하고 졸업 전 마지막 학기쯤 되면 첫째 결혼의 존엄성, 둘째 축첩의 죄악성, 셋째 이혼의 비극에 대하여 수신이나 공민교과서에 이 세 과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였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승만 독재에 이어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1940년대 후반의 당찬 여권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이들은 여성교육이 이와 같이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든 원인은 우리나라 여자 중·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이 여성인격 도야의 핵심이 되는 가정 과목을 오랫동안 등한히 하고 영어·수학 등 입시를 위주로 하는 주지주의 교육에만 치우쳐 왔기 때문이라고 간파했다. 여학생들도 상급학교 진학에만 관심을 모아 미래의 아내, 미래의 어머니로의 기틀을 닦는 가정 과목은 거의 백안시하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경향신문 1965년 1월 22일자 ‘참된 여성 길러내자 전국여중·고교교장회의서 본 미래의 여인상’)

이 여성 교장들은 낡은 사고방식을 뿌리뽑자면서도 예의범절에 중심을 둔 여성 교과서를 따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미래의 여인상’으로 내세운 것은 ‘정모정처’(正母正妻)였다. 현모양처를 껍데기만 바꾼 내용인 셈이다. 이들은 남녀간에 무조건적 평등은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당시 여성들은 학교에서 바느질과 재봉을 배웠다. 이 기술은 우선 ‘가정’을 위한 것이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정모정처’의 일단을 보여준다. 병영국가에서 여성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원 대상이었다.

교과서에서 여성차별은 시정되지 않았다. 1975년 1월 24~25일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한국 여성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주제로 한 모임이 열렸다. 발제를 맡은 윤순덕 교수는 “여성운동을 전개하려면 장기적으로는 의식구조의 개혁과 새로운 성윤리, 새로운 가족제도의 모색이 요청되며 단기적으로는 교육면에서 교과서 내용의 남녀차별 표현 제거, 결혼퇴직제도 폐지, 동일임금제, 국가배상금의 차별 폐지, 고용·승진의 기회균등, 가족법을 위시한 법적인 남녀평등,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여성 참여, 종교적 직위에서의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윤 교수는 여성차별의 여러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교과 과정의 남녀 차별이 공정한 경쟁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70년대 중반 대학 예비고사나 남녀공학 대학교 입시는 주로 남학생들이 수석을 차지했다. 윤 교수는 “고등학교 공통과목 외에 여학교에서는 수예·재봉 등의 과목이 필수로 과해지고 있다”며 “여학생은 사회통념상 집안에서 가사를 돕고 그 위에 남학생보다 많은 교과를 이수하는데, 이 교과는 여자대학 입시 외에는 수험과목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실과5’의 한 페이지. 인권위는 가사와 양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하고, 노동영역에서 성차별 소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실과5’의 한 페이지. 인권위는 가사와 양육은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하고, 노동영역에서 성차별 소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옛날보다 상황이 나아졌고 여성차별을 재는 잣대의 기준이 높아진 측면도 있지만, 교과서 속 여성차별과 반인권 사례는 면면히 이어진다.

서울교대 권치순 교수와 서울 은천초 김경희 교사는 2009년 1월 대한지구과학교육학회지 창간호에 논문을 발표했다. 초등학교 3~6년 10개 과목 교과서 삽화에 등장하는 남녀 비율이 평균 1.33대 1이었다. 사법시험에서 여성이 강세를 보이고 정치 영역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교과서는 이런 현실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남성들은 정치인·법률가·교수·의사·예술가·종교인 등 지도층 인사로 묘사했고, 여성은 교사와 간호사·은행원으로 표현했다. ‘노동자’는 또다른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와 ‘노동’은 아직도 무언가 비천하고 불온한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같은 편견과 왜곡을 조장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각급 학교의 교과서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노동교육원이 노동부로부터 연구용역을 의뢰받아 초·중·고교의 72종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노동자의 파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직업의 귀천(貴賤)을 따지는 등의 내용이 실린 경우가 수두룩했다고 한다.(경향신문 2006년 8월 26일자, ‘노동자는 폭력집단이라고 왜곡하는 교과서’)

이명박 정권의 교과서 우경화를 풍자한 김용민 만평(경향신문 2008년 12월 24일자).

이명박 정권의 교과서 우경화를 풍자한 김용민 만평(경향신문 2008년 12월 24일자).

인권위의 2010년 10월 조사를 보면, 중1 사회 교과서에 “더 이상 파업이나 집회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통령 말씀일까. 이명박 정권은 2008년 교과서 이념전을 벌였다.


국방부는 제주 4·3사건을 ‘좌익 반란’으로 규정하고, 군부정권의 ‘강압통치’를 미화하는 등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통일부도 ‘햇볕정책’이란 용어 대신 ‘화해협력정책’으로 교체하는 등 교과서 58곳을 수정하도록 주문했다.(경향신문 2008년 9월 22일자, ‘교과서 개편·전교조 압박… 이 정부 본격 이념전’)

교과서 우경화는 뉴라이트 등 보수·극우 진영의 요구사항이었다. 2009년 1월 교육부는 중·고교 사회과목 교육과정 개정안을 냈다. 고교 1년 일반사회  교과서는 ‘인권’ ‘정의’ 등 독립단원을 통합·축소했고, ‘경제성장과 삶의 질’ ‘국제경제와 세계화’ 같은 경제 관련 단원을 늘렸다. 이게 다 ‘경제대통령’을 모신 덕분이다. ‘토건과 토목’ 단원만 추가하면 될 것 같다.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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