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곧잘 다루는 소재 중 하나가 ‘국정원장(안기부장, 중앙정보부장 포함)의 수난사’다. 현직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퇴임 이후 뒤끝이 안 좋거나 말로가 비참한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정권 때의 중앙정보부장들의 수난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키워드는 ‘죽음’이다. 김형욱 4대 중앙정보부장은 프랑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김재규 8대 부장은 박 전 대통령 암살 혐의로 사형당했다.

공개적인 행보로 부적절한 처신 논란이 일고 있는 김만복 국정원장(오른쪽)이 2007년 9월 2일 두바이발 비행기 안에서 ‘선글라스 맨’으로 알려진 대테러 협상요원과 나란히 앉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임지선 기자
중앙정보부는 신군부가 집권한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꿨다. 5·6공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인사들의 키워드는 ‘감방’이다. 문민정부 들어 전두환·유학성·장세동·안무혁·이현우씨 등이 구속됐다. 감방의 역사는 계속됐다. 문민정부 때 권영해씨 등이 구속됐다. 국민의정부 시절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이 되었지만, 감방행은 그치지 않았다. 임동원·신건씨가 정치사찰 의혹 등으로 구속됐다. 군사반란, 불법사찰, 불법정치모금, 비자금, 인권탄압의 업보라 볼 수 있다.
참여정부 말기 때 독특한 국정원장이 나왔다. ‘노출’의 시작이다. 음지에서 은닉하고, 은폐하던 전직들과는 다르다.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대선 전날인 지난해 12월18일 방북,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자신이 유출했다고 15일 밝혔다. 그는 이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 (중략) 그는 유출 경위에 대해 “지난 9일 오후 국정원 관계자를 통해 모 언론사 간부에게 면담록이 포함된 국정원장의 선거 하루 전 방북 배경 및 경과 관련 자료를 비보도를 전제로 전달한 바 있는데 결과적으로 본인 불찰로 언론에 보도됐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 2008년 1월 16일자, “내가 유출” 김만복 원장 사퇴-국정원 ‘대화록 파문’ 사과)
‘국가정보’를 언론사에 직접 서비스한 사례는 밝혀진 것으로는 처음이다. 당시 여러 언론은 김 전 원장과 김 통일전선부장의 대화록이 유출된 것은 내부자의 고의성이 짙다고 여겼는데,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김 전 원장은 여러 차례 ‘과도 노출’ 비판을 받았다. 2007년 아프간 인질사태 때가 대표적이다.
아프간 피랍사건과 관련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처신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중략) 카불∼두바이 간 특별기, 두바이∼인천공항 간 항공기에서도 기자들의 접근을 허용했다. “하면 안 되는데…”라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경향신문 2007년 9월 3일자, 金 국정원장 인질석방 과정 ‘부적절한 처신’ 논란-보란 듯이 언론에 노출)
김 전 원장은 귀국 때 선글라스를 낀 국정원 직원도 소개했다. 그는 “‘김선일씨 사건’ 이후 테러전문가를 중점 육성했으며 그 결과가 이 사람”이라고 했다. 김 전 원장의 처신을 두고 논란이 일자 당시 청와대는 ‘21세기형 정보기관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했다.

2010년 6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의혹을 풍자한 ‘장도리’(6월 28일자).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 ‘먹통’과 ‘유출’이다. 원세훈 원장의 국정원은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을 미행한 게 들키고, 리비아에서 군사정보를 수집하던 국정원 직원이 추방당해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정치인사찰 의혹도 받았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태 때는 대북 정보수집의 무능력을 드러냈다. 원세훈 원장은 지난 3월 국정원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때 25시간이 지나서야 보고를 받았다. 경찰·국방부·기무사보다 늦게 보고받았다. 공작도 사후보고도 경찰·기무사와의 정보공유에도 실패했다는 지적을 들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도 북한 발표 이후에 알았다고 한다. 이것도 ‘친서민’ 행보인가. ‘먹통 국정원’ 비판이 일자 낸 물타기 정보라는 지적이 나왔다.
원 원장은 미국 위성사진을 근거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시점·장소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정보수집 수단과 능력을 당국자가 드러낸 것이다. 김 전 원장이 과시형 노출이었다면 원세훈 원장은 변명형, 국면전환용 유출인 셈이다.
원 원장은 지난 12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 위원장이 평양 룡성역에 대기 중이던 열차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북한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애매하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략) 원 원장 발언 근거는 김 위원장 열차를 찍은 미국의 위성사진인 특수영상정보(SI)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과연 국정원이 제공자인 미국 측과 협의 등 철저한 자료분석 과정을 거쳤느냐는 것이다. (경향신문 2011년 12월 22일자, 김정일 사망 이후 / 국정원, 사망 경위 의혹 내놨다 “정보력 무능 비판 물타기” 뭇매)

국정원의 정보능력을 풍자한 ‘김용민의 그림마당’(2011년 12월 22일자).
그런데 원 원장의 정보수집 능력은 오락가락한다. 2009년 2월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원 후보자 누나와 부인의 ‘경기 포천 땅 명의신탁(부동산실명제법 위반)’ 의혹이 일었는데, 그의 답은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처음 듣는 얘기이고, 집사람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안다”였다.
경향신문 박래용 디지털뉴스 편집장은 미스터 빈에 원 원장을 비교했다. 서울시 상수도본부장 출신인 그는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국정원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알아야 할 건 먹통이고, 손만 대면 주변이 소란스럽다. 영국의 코미디 배우 ‘미스터 빈’이 출연하는 첩보물도 이보다 황당할 수가 없다. 이 정부 내내 ‘박원순 사찰’이니 ‘박근혜 사찰팀’이니 민간인·정치인 사찰 얘기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본업보다 딴 데 한눈을 팔고 있었지 싶다. 북한에서 최고권력자가 사망하는 급변사태가 일어나고 ‘특별방송’을 예고한 날 아침 청와대에서는 직원 수백여명이 모여 고깔모자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대통령 생일 축하파티를 열었다. 입만 열면 ‘안보’를 외치는 이 정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볼 만큼 봤지만 이렇게 황당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우리 정보력이 걱정할 만큼 그렇게 취약하지 않다”고 했다. 그게 더 걱정스럽다. 미스터 빈은 웃음이라도 주지만, 원세훈은 무엇을 주고 있는가. (경향신문 2011년 12월 29일자, 원세훈과 미스터 빈)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