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시장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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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엽의 눈]브레이크 없는 시장권력

미시령 터널 속초 쪽 입구에서 그리 멀지않은 화암사는 단아한 풍광이 좋아 한 번씩 찾게 된다. 중학생 아들과 함께 들른 길이라 법당 왼편 언덕 위에 자리한 ‘삼성각’을 향했다. 불교가 도입될 때 토착신앙과의 관계를 설명해주려는 나름의 교육적 의도를 갖고 걸음을 옮기는데, 느닷없이 아이가 하는 말. “아빠, 삼성각도 삼성 꺼야?” 아비의 표정을 살피며 수준 높은 농담을 했다고 자부하는지 아니면 무지한 진담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를 보며 이 아이도 이미 세태를 아는가라는 생각에 문득 당혹감이 든다. 돌아오는 내내 아이들에게조차 세상이 온통 ‘삼성’의 것으로 이해되는 ‘시장권력의 시대’를 떠올리니 긴 운전의 피로에다 마음마저 무거움이 밀려온다.

정치권력이 무시무시했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군인의 시대에 정치권력은 무소불위였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은 그래도 유권자인 시민의 표는 의식하는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느덧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넘어 통제력을 잃고 넘실대는 형국을 드러내고 있다.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은 국민적 관심을 모았고, 이건희 회장은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이 회장 단 한 사람을 대상으로 이른바 ‘나홀로 사면’이 단행되었다. 이유가 뭐든 명백하고 공공연한 법치의 위반이다. 사면 후 이 회장은 정운찬 전 총리가 동반성장 전략으로 제시한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면서 어느새 다시 ‘제왕’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이익공유제에 대해 “경제학 책에서 배우지도 못했고,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조롱어린 말로 묵살했다.

최근 파문을 일으킨 전경련의 비밀문건은 재벌 총수들의 국회 출석 방지와 반기업 입법의 저지를 위해 거물정치인에 대한 로비 할당 지침을 담고 있다. 

몇몇 무도한 전경련 간부의 행태 탓이 크다고 하지만 기업권력의 의회 장악 시나리오나 다름이 없다. 과거 독재정권에서의 정경유착은 강제였다고 핑계 삼을 수 있었지만, 팽배한 기업권력의 시대에 이러한 시나리오는 브레이크 없는 시장권력의 만용으로 비쳐지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은 부패한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을 오염시킨 셈이었다면 오늘날은 견제 없는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부패시키는 꼴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산의 영도에서 200일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진중공업 사태의 사측 태도는 어떠한가? 노사의 극한대결에 정부는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냈고, 3차에 걸쳐 수만명의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탔지만 기업의 총수는 해외를 떠돌다 이제 돌아와 여전히 본질을 회피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어려운 경영환경이나 기업운영의 문제 이전에 시장권력의 오만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기업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선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논리도 틀리지 않다. 문제는 시민들의 눈에, 그리고 기업의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낙오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총수나 사측의 태도를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게 하는 ‘공감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감상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 되었다. 시장권력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판이다. 군부독재는 계엄이다 긴급조치다 해서 요란스럽게 시민사회의 숨통을 조였지만, 기업권력의 거침없는 질주는 노동자와 시민의 밥줄을 조용히 자른다. 이 점에서 오늘날 두려울 것 없는 기업의 세상을 ‘시장권위주의’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권력의 오만에 대한 시민의 저항은 시장권력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업도 시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노동자와 시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기업의 시민성’이야말로 가장 본원적인 성장동력일 수 있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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