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흠의 눈]이국땅에서 바라본 혐오의 지대](https://img.khan.co.kr/newsmaker/1190/20160823_82.jpg)
서로가, 서로가 싫어서 죽겠는 것이다. 혐오의 지대, 그는 그곳에서 왔다. P는 그리스의 한 해변에 누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낮 지중해의 강력한 태양 아래 사람들은 모두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 그만이 파라솔 밑에 숨어 점점 줄어들고 옮겨 다니는 그늘을 쫓아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이 받은 억압을 억압으로 되돌려주는 시대에서 그는 넘어왔다. 내 취향이 아니고, 내가 싫으면 배척해야만 한다. 밀어내야만 한다. 내 구역으로 들어오면 안 돼, 저리가, 소리쳐야 한다. 불신과 불안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관계다. 타인으로 인해 불편과 손해를 본다면 참아서는 안 된다. 꼭 그렇지 않아도 그냥 싫으면 싫어해도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다. 남이 무얼 하는지 신경을 많이 쓰고 참견하고, 오지랖 넓히는, 그래서 집단이 만들어낸 가치에 모든 것을 밀어놓고 통제 가능해지길 원하는 세상, 필요 이상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에 있어서만 억압을 만들어내는 곳, 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약자나 소수자의 불편에 대해선 목소리를 낮추는, 그런 곳에서 온 P는 그리스가 누리는 자유는 너무 방종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억압 받았기 때문에 타인도 억압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부르는 자유는 그런 것이다. 자유는 단절된 공간, 안에 혼자 존재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타인들에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관심이 없다. 관심 받고 싶다, 그는 정체된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옆자리에 누워 그 조그만 비키니 윗도리마저 벗어던지고 태양 아래 누운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를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이 사회는 너무 느슨하다. 그래서 망해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망한다는 것이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는 것 말고 뭘까, 궁금해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말고 망한다는 개념 안에 무엇이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이곳 사람들, 아시다시피 어렵다. 도시 정비는 미루어 둔 지 오래전이다. 좁은 도로와 오래된 건물에서 그들은 불편하게 살아간다. 아니, 그 불편은 단지 우리의 시선이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먹는 게 문제라면 값싼 식료품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P는 이들에게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자 휴대폰을 끼고 산다. 누구도 그에게 그건 하지 마라,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평생을 받아온 사회적 억압으로 남은 것은 뒤틀림뿐이다. 누구는 이래서 싫고, 어떤 사람은 저래서 싫은 것뿐이다. 대부분은 정치적인 잣대와 사회 공공안녕 안에서 판가름 내린 편견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고도의 억압풍토 안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뜨거운 해변에 누워 어떤 중년 남자들이 계곡에서 웃통을 까고 술을 마시다가 제지하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결국 경찰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냈다는 기사와 사진을 본다. 술을 마시건 담배를 피우건 상관하지 않는, 옷을 벗고 싶으면 순백의 나체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그가 떠나온 억압의 한 지대를 휴대폰을 통해 들여다본다. 순간 드는 의문의 고리 하나는 중년의 남자들이 쫓겨난 이유의 진위가 계곡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되어서 그런 건가, 누군가의 직장 상사이고 가부장일 중년의 남자들을 혐오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계곡에서 아름답지 않은 몸을 보여서인가, 어찌됐던 셋 모두 억압을 억압으로 갚은 해프닝이 아닌가, 그는 옆자리의 배불뚝이 아저씨와 웃통을 까고 햇빛을 쬐는 중년 여인의 커플을 쳐다보며 필요 없는 오지랖을 먼 이국땅에서도 넓히고 있었다.
<백가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