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국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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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6개항구 운영권 UAE 국영회사에 넘어가자 ‘안보논리’ 내세운 반발여론 확산

두바이포트월드(DPW)의 미국 항만 운영권 인수에 반대 시위를 벌이는 뉴저지 뉴어크 부두노동자와 트럭운전자 노동조합원들.

두바이포트월드(DPW)의 미국 항만 운영권 인수에 반대 시위를 벌이는 뉴저지 뉴어크 부두노동자와 트럭운전자 노동조합원들.

요즘 미국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외국 도시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구성하는 7개 도시국가 중 하나로 인구 110만 명에 불과한 두바이다. 뉴욕, 마이애미, 필라델피아 등 미국의 6개 주요 항구에 대한 항만 운영권이 ‘두바이 포트 월드(DPW)’라는 UAE 국영회사에 넘어가도록 계약이 체결된 상황에 ‘테러공포증’이 미국 내에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애국주의가 신자유주의를 거꾸러뜨리다 국가 예산지출 심의를 맡은 미 하원 세출승인위원회는 3월 8일 DPW가 6개 항만 운영권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62 대 2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번 주에 있을 하원 전체 표결도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DPW측은 3월 9일 “항만 운영권을 다른 회사에 매각할 생각이 없다”면서 “안보 위협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인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2월 중순만 해도 69억 달러에 계약된 미국의 6개 항구 항만 운영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일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항구들의 컨테이너 선착장 관리와 페리호 운행 등을 관리해온 회사는 영국 해운회사 ‘피닌슬러 앤드 오리엔탈(P&O)’이다. 문제는 이 회사가 2월 18일 DPW에 인수되면서 생겼다. 하지만 인수 후에도 P&O가 기존 노하우를 이용해 사실상의 항만운영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어서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미 안보 당국자들의 눈에는 그랬다. 국토안보부가 ‘국가안보 점검 절차’를 충분히 거쳤고 조지 부시 대통령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DPW가 아랍 국가 UAE의 국영 기업이라는 사실은 실질적인 테러 취약성과 상관없이 일반인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UAE는 2001년 9·11 사태 때 테러범들이 돈세탁 기지로 이용한 곳인데다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이란, 북한, 리비아 등에 보낼 핵 부품을 비밀 선적한 곳으로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때마침 1월부터 계속된 마호메트(무하마드) 만평 파문으로 전 세계적으로 서방과 이슬람 문화권 사이에 적대적인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

“굿바이 두바이, 미국 항구들을 지키자” 는 피켓을 들고 시위 중인 볼티모어 트럭운전자 노조원들.

“굿바이 두바이, 미국 항구들을 지키자” 는 피켓을 들고 시위 중인 볼티모어 트럭운전자 노조원들.

미국인들 사이에 한국사회의 ‘색깔론’ ‘북풍’ 등을 방불케 하는 안보 위협 논란이 일어났다.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미국인들은 왜 하필 지금, 이 지역에 이런 회사가…”라며 의아해한다고 말했다. 하원 국토안보위원장인 공화당 피터 킹 의원도 “이들이 알 카에다의 침투를 어떻게 막아낼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해당 항구지역 주민들은 계약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번 계약을 무효화시켜 달라는 지역 항만회사들의 소송 제기도 잇따랐다.

부시 행정부는 곤혹스러웠다. 대(對) 테러 안보 논리는 이라크를 침공하고 재선 성공을 가능케 한 일종의 ‘국시(國是)’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큰소리 치며 강행한 계약을 엄청난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철회할 수는 없는 노릇. 제약 없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퍼뜨려온 미국 재계의 입장에서도 계약 철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국익에 전혀 이롭지 않은 경제 애국주의 바람을 경계했다.

데이비드 하모드 미국·아랍상공회의소 소장은 3월 2일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경제 애국주의는 아랍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에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며 “미국 기업들이 아랍국 입찰에 초대받지 못하거나 예전보다 한결 회의적인 시선을 받게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셰이카 루브나 알카시미 UAE 경제장관도 “투자 결정에 대해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다면 아랍인 투자자를 이끌기 위한 미국 시장의 경쟁력이 훨씬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논란의 핵심은 시장 논리에 바탕한 신자유주의와 안보논리에 입각한 경제 애국주의의 충돌이다. 부시 행정부의 ‘비극’은 두 가지 모두 그동안 악착같이 추구해온 핵심 가치라는 점이다.

11월 예정된 중간선거 때문에 무게 중심은 거의 일방적으로 경제 애국주의로 기울었다. ‘안보’ 의제 선점에서 늘 공화당에 한발 뒤졌던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이 머뭇거리는 사이 찬스를 잡은 듯 경제 애국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대선 상대였던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3월 2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UAE는 미국의 최대 우방인 이스라엘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하는 나라”라며 “이들에게 항만운영권을 맡기는 것은 미국 법의 정신뿐 아니라 미국인들의 신념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당장 지역 민심 얻기에 급급한 공화당 의원들도 부시 대통령을 비판하며 계약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거래는 기업은 행복하게, 국민은 불안하게 하는 결정”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논조도 큰 영향을 끼쳤다.
틈날 때마다 안보논리를 강조하며 정권의 정당성을 다져온 부시 대통령의 정책이 최악의 ‘자충수’가 됐다는 점이 이번 사태가 갖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DPW에 항만 운영권이 넘어간 미국 필라델피아 항구.

DPW에 항만 운영권이 넘어간 미국 필라델피아 항구.

아랍 속의 싱가포르(?), 두바이 문제의 초점이 ‘안보에 진정 위협이 되느냐 아니냐’라는 문제보다 ‘미국 국민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더 중요해진 상황에 두바이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도 연일 집중 조명되고 있다.

두바이는 아랍 내에서도 가장 아랍 같지 않은 곳이다. 1972년 7개 ‘에미르(emir·왕족)’가 연합해 독립한 UAE는 석유가 가장 풍부한 아부다비 에미르에 의존했다. 두바이 역시 초기엔 ‘오일머니’ 덕을 많이 봤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석유 고갈에 대비해 일찌감치 금융·관광업을 육성하는 체질 변화를 꾀했다.

중동의 비즈니스 중심지를 이끌어온 두바이 셰이크 모하메드 왕세자는 1995년 왕세자 지명과 동시에 향후 10년 간 두바이 미래계획을 세웠다. 해외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인·허가 및 비자 규제를 없애고 세율도 대폭 낮췄다. 덕분에 지난 10년 간 경제 규모가 2배로 커졌다. 원유 의존도도 6% 밑으로 내려가 2011년까지 원유 의존도를 0으로 하는 경제구조 변화를 이루겠다는 목표에도 한 걸음 다가갔다. 두바이는 논란 중인 미국의 6개 항만 외에 이미 중국의 9개 항만권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두바이 당국은 투자자와 관광객들을 끌기 위한 이미지 관리에도 철저하다.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700여m)’를 짓는데 비행 노선으로 고도 제한이 생기자 비행기 루트를 바꾸도록 지시해 70여 개 노선을 변경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환경오염 논란을 무릅쓰고 거대한 인공섬을 만들기도 했다. 최근 1~2년 사이 각국 언론사의 여행 담당 기자들에게 경비를 대주며 초청해 두바이를 소개하는 기사를 전 세계에 확산시킨 것은 한국 내에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일사불란함 뒤에는 언론 자유 제한 등 전제(專制) 정치의 그늘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신문·방송뿐 아니라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조차 비판적 견해를 쉽게 내놓지 못한다”고 전했다. 여기에 많이 줄긴 했지만 돈세탁과 주식시장 내부자 거래 등이 여전한 것도 불안한 미국인들의 마음을 100% 안심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국제부/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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