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의 불완전 박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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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전 양판점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사양의 제품들이, 역시 이해하기 힘든 높은 가격표를 달고 진열돼 있다. LG나 삼성 등 한국 가전이 편의성도 가격경쟁력도 괜찮아 보이건만 일본 시장에서는 이미 국제 경쟁력을 잃은 일본 가전기업의 제품들이 주르륵 전시돼 있다. 노트북도 태연하게 DVD 드라이브가 내장된 묵직한 일본산 제품들이 여전히 팔리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갈라파고스 현상이다. 도시바나 샤프는 중국과 대만에 인수돼 남의 나라 회사가 된 지 오래지만 개의치 않는다. 우리라는 느낌이 중요하다.

Photo by CardMapr.n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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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국 기업을 우대하는 든든한 내수시장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탄탄하고 널찍한 안방에서는 한없이 게을러진 채 드러눕고 싶어지기도 한다. 혼다나 토요타 등은 전기차 신제품의 투입 속도 및 인지도에서 이미 현대·기아에 밀리고 있다. 내연기관, 그리고 그 연장선상으로서의 하이브리드에서 이룬 달콤한 성공체험에 빠져 있어서다. 눈 앞에 펼쳐진 살갑고 친절한 내수시장은 착시를 일으킨다.

지난 시절 소니의 트리니트론 브라운관 기술은 압도적이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값비싼 애플 모니터도 이 부품에 자랑스럽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신뢰할 수 있는 주요 자재 산지의 역할을 어느새 한국의 대기업들이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소니의 TV도 삼성과 LG의 패널로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도 실은 ‘한국식 갈라파고스’ 현상이 오랜 기간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분야가 특히 심각하다. 언어와 문화라는 비관세무역장벽에 더해 사회 분위기도, 이를 뒤따르는 규제도 내수기업을 과보호하고 있다. 그 대가는 소비자가 치르고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같은 가격을 주고 샀어도 한국에서는 그 잠재력을 100% 발휘할 수 없는 식이다. 그나마 가격이 같으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더 비싼 경우도 많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에 기본 탑재된 애플과 구글의 한국 지도는 불완전 제품이다. 기본 기능인 내비게이션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외국 기업의 국내 지도 활용을 규제로 힘들게 한 사정이야 있겠지만 대신 세계적인 혁신과도 멀어졌다. 구글은 최근 차량의 엔진 유형에 맞춰 연료 효율이 높은 경로를 제공하기로 했다. 미 대도시는 물론 도쿄 등에서는 인공지능에 의한 3차원 몰입형 지도가 소개될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 빈 자리를 국산 지도 앱들이 시간차를 두고 열심히 따라가는 중이지만 소비자가 해외의 혁신을 알지 못하니 조바심낼 필요가 없다. 지도뿐만 아니다. 애플이나 구글의 순정 페이 기능도 마찬가지다. 갈라파고스는 외래종을 몰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에 능할 때 만들어진다. 국내 통신사가 초창기에 유통하던 스마트폰에는 앱도 깔지 못했고, 와이파이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내수기업은 그것이 소비자에게 아무리 유익해도 당장 나의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하는 기능은 넣지 않는다. 해외의 대안이 수입돼 소개될 리 없다면 소비자는 불편함을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업계와 정부가 마주 앉으면 얼마든지 창의적인 비관세장벽을 두를 수 있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를 안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날들은 아이폰의 등장으로 서서히 저물어갔지만, 그 아이폰조차 지도나 페이 같은 핵심 기능이 빠진 불완전 박래품(다른 나라에서 배로 실어온 물품) 신세였던 셈이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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