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센치할 정도만 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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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 센치해진다. ‘센치하다’는 감상적이라는 뜻의 비표준어이지만 오래 관행적으로 쓰다 보니 나름의 느낌을 가져 표준어로 대체하면 그 맛이 사라진다.

8월 11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1동 주택가에서 육군 제51사단 예비군지휘관과 상근예비역들이 수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8월 11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1동 주택가에서 육군 제51사단 예비군지휘관과 상근예비역들이 수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쨌든 비는 내리고, 내리는 비를 보면 센치해진다. 마음이 말랑말랑, 기분이 몰랑몰랑, 감상적이 된다. 어? 그런데 비가 내려도 너무 많이 내린다. 번쩍번쩍 번개가 계속 지나가고, 시간차를 두고 천둥이 우르릉 쾅쾅. 이제 ‘센치’는 감상이 아니라 강우량으로 바뀐다. 도대체 몇센치나 내린 거야? 사흘이 지나서야 우리 동네 동작구는 신대방동을 기준으로 무려 450㎜가 넘게 쏟아졌음을 알았다. 45㎝. 침수지역은 무릎 위로 올라온 빗물을 헤치며 다녀야 했다. 저지대에 살던 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이웃동네 관악구 신림동에서는 탈출하지 못한 일가족이 생명을 잃었다. 강남구에서는 길을 가다가 맨홀로 휩쓸려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 집은 언덕에 있는 아파트여서 상대적으로 안전했기에 더 위쪽의 아파트는 더 안전하겠지 싶었다. 자정 무렵 그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속보가 떴다. 어, 더 높은데? 산사태로 토사가 아파트를 덮쳤다고 한다.

폭우의 공포, 이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월요일 밤에 벌어진 일이다. 화요일 아침, 비는 좀 잦아들었지만 출근길에 본 동네 전통시장의 풍경은 참담했다. 서울에서 주택가, 아파트단지와 근접해 있어 꽤 번창하고 활력 넘치는 대표적 재래시장이었다. 1층 상가는 너나없이 침수피해로 못쓰게 된 상품들이 쓰레기 산으로 쌓여 있었다. 채소, 과일, 생선, 건어물, 고기, 이불, 의류 등이 뒤섞여 폐허를 방불케 했다. 수요일 오전 출근길에는 이 시장 어귀 행정복지센터에 천막이 섰고, 피해복구를 위한 자원봉사모임이 왔다. 국민의 뭐라나 정당이라고 했다. 고맙다고, 수고들 하시라고 인사 건네며 출근해서 뉴스를 보니 바로 그 자리에 왔던 국회에서 큰일 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어. 사진 잘 나오게.”

안 그래도 이틀간 폭우에 잠을 못 자 멍한 머리였지만 신기하게도 입에서 자동으로 뭐라 뭐라 말이 흘러나왔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내 귀로 들으니 욕 같기도 했고, 잘 모르겠다.

마침 그 무렵 강남에서는 암호화폐와 가상자산, 블록체인을 주제로 한 큰 행사가 열려 외국에서도 많이 참가했다는데 폭우가 SNS로 전 세계에 타전되면서 명작영화 <기생충>의 한장면을 연상케 한다며 화제가 됐다. 빗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집, 변기에서 똥물이 역류하고, 가족은 와이파이를 잡으러 천장을 향해 오르는 이상한 공간.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을 한컷에 담은 상징적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칼럼은 달을 향해 여행하는 우리의 달탐사선 ‘다누리’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지구 위의 재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면적 체험에서 더 들어가야 한다. 기상이변의 원인인 기후변화가 왜 일어나는지 말이다. 얼마 전 자신의 별로 돌아간 우리 세대의 여신,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 ‘블루 아이스 크라잉 인 더 레인(Blue Eyes Crying In The Rain)’을 듣는다. 비는 작물이 잘 자라고, 센치할 정도만 내리면 좋겠다.

<최영일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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