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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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에지

“왠지 이 시체를 보면 안심이 돼.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언제나 헷갈리는데 이 시체를 보면 용기가 나.” 야마다는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학교 근처 덤불로 시체를 보러온다. 그의 ‘비밀 보물’이다. 동급생 하루나는 야마다의 비밀 보물을 소개받아 처음으로 진짜 시체를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실감이 안 났다.” 둘은 한때 산 사람이었던 그 시체를, 한동안 바라본다.

오카자키 쿄코의 <리버스 에지> 한 장면 / 고트

오카자키 쿄코의 <리버스 에지> 한 장면 / 고트

1993년 연재를 시작한 <리버스 에지>는 그 시대의 사회, 문화 풍경을 인물 속에 육화해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작가 오카자키 쿄코는 1980~1990년대를 거쳐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특히 <리버스 에지>는 <핑크>, <헬터 스켈터>와 함께 오카자키 3대 명작으로 꼽힌다. 버블 붕괴 시기를 전후한 일본의 텅 빈 풍요 시대에 어떤 인간이 탄생했는지 증언하는 작품들이다. <리버스 에지>는 그중 가장 음습하고 불안하며 무신경한, 색다른 비극이다.

이 색다른 비극은 시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덤불 속에 방치된 변사체는 분명 한때 산 사람이었을 이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의 커다란 흔적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하루나와 야마다에게 시체는 비극적 정취로 다가가지 않는다. <리버스 에지>의 비극은 시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드러나 보인다. 달리 말하면,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극이다. <리버스 에지>를 가로지르는 강물에 비친 일본사회의 풍경이다.

본디 비극은 그리스에서 시민의 덕성을 계발하는 예술 도구였다. 운명에 맞선 한 인간의 사투와 실패를 무대 위에서 상연한다. 관객들은 그 가상의 인생에서 배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사회적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며, 올바른 도덕적 선택이란 무엇인지를 카타르시스와 함께 배우는 학습의 장이 바로 비극이었다. 시민들은 비극을 보고 배워 현실에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거나 비극적 상황에 대처할 역량을 지닌 주체가 된다. 극 장르로서의 비극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사건이 같지는 않으나, 배움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조명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로 세계는 더 이상 그런 잔혹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함을 통감했다.

하지만 <리버스 에지>에서 비극은 배움을 낳지 않는다. 이 작품에 추출돼 표현된 일본사회의 개개인은 그저 욕망에 충실하기에 삶의 어떤 자극도 욕망으로 이어낸다. 욕망과 이어진다면 누군가의 시체는 살아 있다는 안심감을 선사하고, 욕망과 무관하다면 그 시체는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다. <리버스 에지>에 등장하는 시체가 한구 두구 늘어나지만, 여전히 인물들에게는 비극으로 가닿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새로운 시체를 반가워하기까지 한다. 이런 <리버스 에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비극이 된다. 인간성의, 사회의 죽음과 실패라는 두 번째 비극이다.

한국 경제가 일본 버블 붕괴 때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유독 눈에 밟히는 요즘이다. 닮은 것이 경제 상황만일까. <리버스 에지>가 추출한 버블의 인물들과 똑 닮은 인간 군상이 점점 더 자주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는, 파업과 단식과 오체투지라는 인간적 사투를 대하는 사회의 풍경이 딱 그렇다. 이 두 번째 비극에서마저 배울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인간은 무엇이 될 것인가.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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