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상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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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현실, 당신의 선택은?

<아이 앰 어 히어로>와 <보이즈 온 더 런>의 작가 하나자와 켄고의 놀라운 데뷔작 <르상티망>은 가상현실과 온라인을 주제로 한 SF 만화다. 연애하고 싶지만, 자신을 낙오자로 여기는 주인공 타쿠로가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처음으로 이성을 만나고,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이야기다. 마치 <공각기동대>와 <전영소녀>를 섞어 만든 것 같은 작품이다.

하나자와 켄고의 <르상티망> 한 장면 / 재미주의

하나자와 켄고의 <르상티망> 한 장면 / 재미주의

‘모태솔로 남성이 퀸카의 마음을 얻는다!’와 같은 남성판 신데렐라 이야기는 이미 흔하지만 <르상티망>의 그것은 어딘가 다르다. 타쿠로는 숨겨진 매력 대신 반쯤 벗어진 머리와 볼록하게 나온 뱃살을 가진 (겨우 서른인데 중년으로 묘사되는) 평범한 인쇄소 직원이고,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성은 게임에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 그러니까 그렇게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 츠키코다.

알고 보니 츠키코의 존재는 거대한 가상현실 세계를 만든 제작자가 몰래 심어놓은 일종의 버그 같은 것이었고, 타쿠로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쩌다 보니’ 세상을 구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마치 알파고의 수천년 후 버전일지도 모를 머신러닝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의 신과 이 세계의 추종자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현실마저 삼키려고 하고, 주인공은 ‘의도하지 않게’ 그들에 맞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타쿠로는 가상공간에서의 자신을 위해 현실에서 노동을 지속한다. 특히 츠키코와 육체적 관계의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이 전신에 작동하는 보디슈트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다. 역설적으로 진짜 같은 가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법 비싼 하드웨어가 필요하고, 그토록 힘들었던 현실을 견뎌내는 동기부여가 된다. 결코 만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좀더 빠른 프로세서와 선명한 디스플레이 그리고 쾌적한 온라인 접속을 위해 꾸준히 대기업에 돈을 바치고 있다. 이미 10여년 전에도 싸이월드 속 미니미와 미니룸을 꾸미기 위해 수많은 도토리를 구입한 경험이 있다.

<르상티망>의 후반부에는 타쿠로에게 갈등의 순간이 찾아온다. 현실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건네는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입사 동기이자 영업사원인 나가오는 동정심인지 인기 많은 남자에 대한 반발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타쿠로에게 접근한다. 물론 낮은 확률로 진실한 호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민 끝에 타쿠로는 그(나가오)의 요청에 가상현실에 접속하기 위해 구입했던 컴퓨터와 장비들을 팔아버리기로 한다. 현실이 만족스럽게 흘러갈 때, 가상세계의 아바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반대의 경우 가상세계는 현실 도피처가 된다. 많은 이들이 화제가 되는 기사의 댓글을 통해 르상티망(훨씬 복잡한 개념이긴 하지만,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발산하고,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는 커뮤니티를 통해 안정감을 얻으며,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취향과 일상을 과시한다. 나아가 인터넷 방송 진행자에게 돋보이려고 큰돈을 쓰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일도 있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네트워크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화상으로 회의하며 방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메타버스, 가상화폐, 대체불가능토큰(NFT) 같은 것들이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압도하는 지금 <르상티망>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황순욱 초영세 만화플랫폼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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